May the road rise up to meet you,

And may the wind be always at your back.

0500_독서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이동용)

겨울밤 2024. 7. 25. 21:09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표지(전자책)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표지(전자책)

제목: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지은이:이동용

 

출판사:추수밭

 

독서일:2024.721.~2024.7..

페이지:

ISBN13:9791155402320

소장여부:대출(전자책)

202432번째 독서


독서배경

유료(밀리의 서재, 윌라 오디오북 등)가 아닌 무료인 전자책 도서관(공공 도서관의 전자책 대출 서비스)은 읽을 수 있는 전자책이 좀 적은 편이다. 특히 관심을 갖을 만한 책은 더 적게 느껴진다. (종이책이나 전자책 판매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 하는지)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나 인기 작가의 작품도 전자책으로 빨리 구비되지 않는 느낌이다.

 

별로 없는 전자책 중에서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를 보는 중 쇼펜하우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선입견이 들며, 읽기가 망설여졌다.

2024.02.24 - [0500_독서] - 쇼펜하우어 인생론 사는 게 다 그래(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인생론 사는 게 다 그래(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인생론 사는 게 다 그래 제목:쇼펜하우어 인생론 사는 게 다 그래 저자: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출판사:춤추는고래 독서일:2024.2.26.~2024.2.26. 페이지:260 ISBN13:9791187867791 소장여부: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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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 전에 쇼펜하우어 인생론 사는게 다 그래를 읽었을 때 기억과,쇼펜하우어=염세주의=삶은혼자다=인생은불행하다=방법(희망)없다&참고견뎌라’ 라는 스테레오 타입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45년 넘게 살아보니 쇼펜하우어선생님의 말씀이 크게 틀린 건 아닌데, 그래도 참고견뎌라라는 부분에 반발감이 들어 자주 떠올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이 어디선가 익숙한 느낌의 기시감이 들어 읽어보기로 했다. (얼마전에 J가 도서관에서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김영사) 책을 빌려달라고 해서, 머릿속에 비슷한 제목에 대한 각인 효과가 발생했는지도 모르겠다)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속표지(전자책)

표지

표지는 유화로 그린 듯한 경변 풍경의 그림이다. 표지 중간에 파란 강물이 수평으로 흐르고, 강물 아래로 가까운 쪽은 강변의 밝은 모래와 어두운 색의 흙이 있고, 강물 위의 먼쪽은 회색 산들이 서있고, 그 위의 하늘은 밝은 녹색으로 그려져 있다. 강변과 산에 녹색이 없는 게, 추운 겨울의 풍경이란 느낌이 든다. 표지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고독해진다. 

 

표지 아래쪽의 고통으로 가득한 삶에서 희망을 찾는 법/비극에서도 희극을 발견하는 쇼펜하우어의 시선의 핵심 문장에서 다시, 역시나 하고 쇼펜하우어=염세주의=삶은혼자다=인생은불행하다=방법(희망)없다&참고견뎌라라는 나의 스테레오 타입 생각이 떠오른다.

 

저자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저자 소개(전자책)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저자 소개(전자책)

지은이는 수필가이며 철학자이고, 독일에서 철학 관련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니체, 쇼펜하우어, 괴테, 키르케고르, 바그너, 릴케, 카프카, 헤세 등의 실존주의 철학의 전문가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저서로 초인 사상으로 보는 인문학, 니체와 초인의 언어, 사람이 아름답다등이 있고, 번역서로 아침놀, 이 사람을 보라,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등이 있다고 소개 되어 있다.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출판정보(전자책)

차례

목차
머리말 염세주의 철학이 주는 뜻밖의 위로
또 하나의 머리말 독서 나침반과 여행 준비
 
1부 마음으로 가는 길 찾기
 
1장 이성: 좋은 말은 평생 해도 모자란다
철학은 지옥 같은 세상에 밝음을 선사한다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사랑이 지혜보다 앞에 있다
말공부는 삶의 기술이자 수양이다
불안을 인생의 친구로 삼으라
다양한 생각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은 함께하는 삶을 말하는 사람이다
 
2장 인연: 마음이 닿아야 사랑도 할 수 있다
삶은 깨달아야 의미가 주어진다
마음은 풀어놓을 때 다잡을 수 있다
나에 대해 생각할수록 삶은 선명해진다
개별적인 존재, 그래서 함께하는 존재
철학은 사랑의 학문이다
끝을 알아야 시작도 할 수 있다
삶을 제대로 보려면 거리가 필요하다
 
3장 운명: 어쩔 수 없다면 운명이다
누구나 운명을 맞닥뜨린다
가짜 운명으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
질투를 피할 수 없다면 이용하라
사람의 만남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어른은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혼자가 되려면 마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늘 실수를 경계하라
 
2부 잘 살기 위해 방황하기
 
4장 어둠: 밤이 되어야 별이 보인다
진정한 우정은 어려울 때 빛을 발한다
세상은 ‘고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불행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행복이다
어두운 생각이 실수를 낳는다
세계를 극복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보는 대로 생각한다
눈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한다
 
5장 고통: 이 세상이 사바세계이다
삶이란 지극히 불편한 것이다
우연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린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삶의 훈련은 고통 속에서 진행된다
고통을 견디면 인식이 주어진다
남을 비판하고 지적하려는 데서 실수가 발생한다
 
6장 죽음: 생로병사가 깨달음의 숙제이다
악마와 만나라
세상은 생지옥이다
죽음은 최후의 고통이다
살고자 하면 싸워라
태어나고 늙어가고 병들어 죽는다
노인은 ‘인간 세계’를 가장 잘 안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3부 나를 가둔 틀에서 벗어나기
 
7장 행복: 행복과 불행은 생각하기에 달렸다
생각은 노년도 청춘으로 만들 수 있다
삶을 연습과 반추로 채워라
소년과 노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행복도 능력이다
건강 없이는 행복도 없다
의지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이기심을 극복하면 더 큰 행복이 온다
 
8장 희망: 희망은 재앙이 아니다
질문을 거듭해야 거대한 세상을 볼 수 있다
희망은 허망함을 전제한다
어떤 희망을 품을 것인가
희망이 삶을 우롱할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희망은 희미해진다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도 씨앗과 같은 존재이다
 
9장 인식: 삶은 깨달을 기회이다
인식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단계를 얻는다
인식이 먼저인가, 의지가 먼저인가
인식이 주어지면 상황이 변한다
세상에는 엉터리 철학이 너무도 많다
이 시대는 철학이 추방되었다
잘못된 인식은 잔인한 현상을 낳는다
위대한 정신은 삶에 필요한 메시지를 들려준다
 
10장 해탈: 멀리 떠나라 그리고 나의 별이 돼라
나쁜 의지는 자기 자신을 속인다
좁디좁은 마음을 거대한 듯 착각한다
가면은 언젠가 벗겨진다
인생의 껍데기는 가라
진정한 인식 속에는 ‘내가’ 없다
생로병사를 넘어 열반에 이르러라
무의 형식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낸다
 
맺는말 죽기 전에 꼭 읽어봐야 할 책
주석

 

 10개의 장과 각장의 7개의 저자의 아포리즘 단편으로, 제목처럼 삶에 대한 70개의 방법을 주장하고 있다.

 

최종 감상

우선, 생각보다 쇼펜하우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게 적었다. 먼저 저자의 생각이나 주장을 먼저 말하고, 가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철학적 관념을 추가해서 말하고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독일어: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는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철학 주저다. 독일 관념론의 한 전제에서 출

ko.wikipedia.org

 

책은 쇼펜하우어 철학의 해설서가 아니라, 저자가 전체적인 삶에 대해 말하는 아포리즘aphorism’이라 할 수 있다.

 

보통 비슷한 유형의 책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 책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의 차이는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의 어감의 차이가 있다. 삶을 수동적으로 왜 살아야 하는가?’가 아닌, 이미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의미를 먼저 찾아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삶에 의미 부여가 되면, 삶에 염세적이고 공허한 마음을 관리할 수 있는 의지를 갖출 수 있다고 받아들였다. (삶의 의미는 빅터 플랭클의 로고테라피에서 주장했던 내용이다.)

2024.01.24 - [0500_독서]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제목:빅터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원제:Man’s search for meaning 저자:빅터 프랭클Viktor Emile Frankl 역자:이시형 출판사:청아출판사 독서일:2024.1.21.~2024.1.23. 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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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70개의 아포리즘은 나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고, 하나 하나씩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젊었을 때는 나이 든 철학자의 꼬장꼬장한 강의가 잔소리 같아 귀에 거슬렸는데, 이제는 이런 말들이 마음으로 와 닿는다. 예전에는 이런 철학적 관념을 이해해도 현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제는 현실을 바뀌지 않는 것이니, 내가 바뀌어야겠구나란 생각이 든다. 내가 바뀌는 것을 실천하는 건 좀 더 나이가 든 후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

 

P. S.

마지막으로 약 30년 전 학생때 친구의 말이 생각이 난다.

" 사는 게 지옥 같고, 인생의 낙은 없다. 내가 해탈하지 않고는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겠냐?" 

그때는 이 친구의 말을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그저 내가 모르는 상황이 그 친구를 힘겹게 하는 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 괴로움은 하나씩 갖고 있다. 그걸 밖으로 드러내냐 안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친구의 호소를 마음 속으로 반문하고 있었다. 

지금 그때의 이 친구를 만난다면 공감하며 그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보니, '삶이라는 지옥'  말의 기시감은 이 친구에게 들었던 말이었던 것 같다. 

 

 

 책속의 발췌(또는 생각나는 줄거리) 

더보기

머리말

 

염세주의 철학이 주는 뜻밖의 위로

위로는 위험하다.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에게 위로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고,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질투심이나 경쟁심을 자국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거만한 사람은 위로를 들어도 화를 내고, 지혜로운 사람은 위로를 들으며 사랑한다’라는 성경 말씀도 있다지만, 위로는 사실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것이다. 거만한 사람도, 지혜롭지 않은 사람도,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까지도 저마다의 생각으로 위로를 건넬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위로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나 위로가 될 수는 없다. 어쩌면 위로도 기술이다. 어떻게 위로가 통할 수 있을지 그 이유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이다. (1%)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책은 묘한 매력이 있다. 배우고 나면 전혀 다른 것이 주어진다. 염세주의 철학도 감당하고 나면 깨달음의 기회가 주어진다. 쇼펜하우어는 인습적인 기독교적 방식을 버리고 힌두교적 혹은 불교적 방식에서 해답을 찾는다. 후자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시바세계로, 참고 견뎌내야 하는 세계로 소개한다. 이 세상이 고해苦海라고, 눈물의 바다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런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이념이 반전을 제공한다.
세상이 지옥 같고 흉측해도 그 세상을 알고 나면 나의 것이 되어 아름답게 펼쳐질 수 있다. 삶은 깨달을 기회이다. ”넌 안 될 거야!“라는 말을 듣고 나서, ”그래, 난 안 돼! 그래서 어쩌라고!“하고 대꾸하고 나면, 왠지 모르게 예상치도 못한 힘이 솟구치게 될 것이다. (1%)

 

또 하나의 머리말

독서 나침반과 여행 준비

 

문제에 대한 의식도 없으면서 답을 기대한다면 욕심이다. 일단 문제의식부터 장착해야 한다. 그래서 걱정이다. 무작정 침대 위에 누우면서 치료해달라고 말하는 환자보다 더 황당한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어떤 병원으로 어떤 의사를 찾아가는지 확실히 아는 것이 급선무이다. (중략)

독서는 일종의 여행이다. 정신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여행할 때는 떠난 곳에 대한 미련보다는 떠나면서 향하고 있는 곳에 대한 동경이 더 요구된다. 그러면서 마음도 여행지에 맡겨야 한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여행지가 제공하는 온갖 정보의 빗물에 흠뻑 젖어봐야 한다. 그것이 빗물이 아니라 눈물이 되어 흘러내릴 때 감정은 새로운 힘으로 솟아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반전의 이야기야말로 사람의 문제이다. (2%)


1장 이성 좋은 말은 평생해도 모자란다

 

쇼펜하우어의 선배들, 특히 ‘독일 관념론’이라는 불리는 철학을 펼쳤던 칸트와 헤겔은 이성을 신성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성은 신성한 것이다. 이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성에 대한 찬송가를 불러대던 시대에 맞서 쇼펜하우어는 이성을 그저 도구 정도의 역할로 내려앉히는 혁명을 시도한다. 이성은 신성하지도 않고 신성할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성은 그저 거울과 같아서 들어온 것만 보여준다는 것이다. (2%)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첫 번째 방법' 페이지(전자책)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첫 번째 방법' 페이지(전자책)

 

밝음의 학문이 철학이다

 

철학은 혼자서 생각하는 능력이다. 혼자가 되어도 절망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잘 생각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능력이다. 철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게 하고 또 기어코 질문에 걸맞은 대답을 찾게 해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것이 철학이라는 영역에서 던져놓은 대표적인 질문이다. (4%)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사람은 배워야 한다.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일단 다 배운 뒤라야 철학이 시작된다. 철학자는 자유로워야 한다. 생각이 어느 하나에 얽매이고 나면 철학은 멀어지고 만다. 생각은 자유이다. 하지만 생각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일단 배워야 마땅하다. 배우지도 않고 생각하려 할 때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4%)

 

이성은 형식이고 생각은 내용이다

 

돌고 도는 말 속에 중심에 꿰차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중심점이다. 이성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얘기이다. 이성적 존재라서 이성이 문제이고, 이성이 문제여서 아는 것이 문제가 된다. 도대체 이성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일까?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저 먹고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말해주는 수수께끼 같은 사실이다.

이성은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중력처럼 작동한다. 모든 것은 이성으로 끌려 들어올 수 밖에 없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성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이성의 힘으로 인해 마침내 생각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물이 이성 속에서 변신을 한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은 이성이라는 거울 속에서 왜곡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지고 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사람이기에 가능한 질문이다.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느닷없이 던져놓아도 이 질문은 유용하게 작동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질문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 자체가 이미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자기 책임이다. 이성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오롯이 자기 몫이 된다. 생각하는 능력은 형식으로 주어져 있다. 이제 그 형식 속에 어떤 내용을 채울 것인가가 문제이다. (6%)

 

모두를 도와주어라

 

누가 뭐라 해도 철학은 사랑의 학문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사랑하기 위함이다. 고대 그리스어도 또 라틴어도 모두 ‘필로소피아Philoshophia’라고 하는 이 단어를 ‘철학’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필로스Philos’는 사랑이라는 단어이고, ‘소피아Sophia’는 지혜라는 단어이다. 사랑은 동사로서의 역할이 강하고, 지혜는 내용을 규정하는 의미가 지배적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행동이 전제되어야 마땅하고, 지혜는 삶에 이로운 내용으로 채워져야 진리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하면서 증오하는 것이 인간의 모순이다. 기도할 땐 성스러운 척하다가 기도가 끝나면 남을 험담하기 일쑤인 것이 인간의 알량한 행위이다. 입만 열면 남을 평가하고 폄하하며 거짓말을 남발한다. 이런 행위를 멈추기 위해 사람은 배워야 하는 것이다. (7%)

 

인간은 언어의 사용 속에 존재한다

 

언어는 이성의 산물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고, 그 인간적인 존재의 의미는 언어의 사용 속에서 증명된다.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지면, 그가 어떤 말을 하며 살았는가를 살펴보면 될 일이다. 그 남겨진 말들이 별들이 되어 나의 삶을 더 빛내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족쇄가 되어 내 삶의 가치를 추락시킬 수도 있다.

평생을 걸쳐 한 말들이 생각에 날개를 달아주며 먼 곳으로까지 비상하게 도와줄 수도 있지만, 그 말들이 덫이 되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자기가 하는 말들이 중력을 느끼면서도 무지개를 만드는 물방울이 되게 해줄 수도 있지만, 그 말들이 원인이 되어 끝없는 후회와 절망의 늪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얼마나 많은 별을 얻을 것인가? 얼마나 무거운 족쇄를 찰 것인가? 그 또한 평생 동안 내뱉은 말의 크기가 결정될 것이다. (8%)

 

인간 이성은 형이상학을 추구한다

 

생각이 확신을 낳는다. 신앙이 확신을 제공한다. 생각이 확신으로, 그리고 그런 확신이 신앙으로, 또 그런 신앙이 종교로 이어가는 연결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중략)

몸으로 사는 세상도 있지만,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도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보이는 세상은 한계가 뚜렷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상은 그 한계를 드러낼 수가 없다. 이른바 ‘무궁무진한 세계’일 뿐이다. (10%)

 

인간의 의지와 마음은 땅의 운명을 생각한다

 

사람의 이성 때문에 보이지 않는 세상, 즉 늘 극단적인 영원성을 생각한다. 천국도 지옥도, 하늘의 뜻도 대지의 뜻도, 천사도 악마도, 좋은 놈도 나쁜 놈도, 친구도 적도, 선善도 악惡도 다 생각할 수 있다. 아직까지 생각지도 못한 것이 있을 뿐이다. 생각을 많이 거듭한 사람일수록 삶은 풍부해질 것이고, 생각이 많이 거듭한 민족일수록 역사는 찬란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거듭한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영원을 생각하는 존재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모순이다. 그 모순을 깨달아야 삶이 기회를 제공한다. 그 모순으로 인해 생기는 불안을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친구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이념으로 키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1844)이란 책을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불안을 아는 존재야말로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반전만이 깨달음의 증거가 된다. (10%)

 

비판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사실 비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공부를 하면 비판은 쉬운 일이 된다. 자기 생각이 형성되고 나면 남의 생각은 하찮게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잔소리가 심해지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잔소리가 입에 걸리게 된다. 하지만 잔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노인은 외롭다. 하지만 왜 외로운지를 모른다. 깨닫지 못한 탓에 억울한 것도 많다. 불평으로 아까운 세월을 보낸다. 원망으로 삶을 도배한다. 그래서 노인이 될수록 삶은 흉측한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늙어도 늙지 않을 수 있다. 전자의 늙음은 시계 속의 시간, 즉 물리적 시간에 의한 것이고, 후자의 늙음은 보이지 않는 시간, 즉 생각으로 임하는 시간이다.

(중략)

웃으면서 대화할 수만 있다면 즐거울 수 있다. 남의 말에서 오류를 찾아내려고 혈안인 사람은 적을 만들 수 있어도 친구는 만들 수 없다. 살아가면서 소중한 시간을 적을 만드는 데 사용하기 보다는 친구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편이 더 낫다. 적은 많으면 많을수록 외로워지고 위태로워지겠지만, 친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더불어 웃을 일이 많아진다. (11%)


 

2장 인연 마음이 닿아야 사랑도 할 수 있다

 

영원히 살 거라는 착각

 

싯다르타는 생로병사라는 질문을 품고 출가했다. 그는 알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질문이 생기면 대답을 원할 수밖에 없다. 대답을 듣고 싶은 한, 질문으로부터 해방은 불가능해진다. 질문은 생각을 감옥 속에 가두지만, 결국에는 그 질문이 대답을 찾게 하고, 그 질문이 석방과 해방의 주역이 될 것이다. 빛을 보려면 어둠의 원리부터 깨쳐야 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빛을 보고 나면 괴롭혔던 온갖 사물들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중략)

사람은 이성적 존재라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것이다. 죽음은 그저 이성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그것을 경험의 내용으로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람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겠다. 게다가 이성조차 하찮기 그지없다. 시험을 다 치르고 난 뒤 시험장을 떠날 때, 시험을 본 내용은 순식간에 잊힌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토록 가소롭기 짝이 없다. (14%)

 

모든 건 자신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은 눈만 뜨면 볼 것을 찾아 헤맨다. 볼 수 없으면 동경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게다가 현실 속에서 보이는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허우적거리기 일쑤이다. 대낮인데도 세상이 어둡다고 말하고, 텅 빈 공간인데도 답답하다고 말하며, 끝도 안보이는 길에서도 길이 없다고 한탄한다. 도대체 생각하는 존재에게 생각은 무슨 짓을 하는 것일까? 생각은 자유인데, 도리어 생각이 생각을 구속한다. 생각이 생각을 바보로 만든 꼴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생각이 바뀌고 나면 어떤 생각 속에서 허덕이던 자기 모습이 보이는 이상한 현상과 마주하게 된다. ‘아! 내가 그랬구나!’하고 인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생각은 바뀔 수 있다. 생각은 변화에 직면할 수 있다. 변화 속에서 생각은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그 가능성의 세계가 바로 생각하는 존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세상을 너무 좁게 만드는 것도 자기 자신이고, 세상을 무궁무진한 영역으로 바꾸는 것도 자기 자신이다. (16%)

 

개별적인 동시에 함께하는 존재

 

‘나’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이다. 그 존재에 대해서 치밀하게 설명했던 철학자가 쇼펜하우어이다. 그는 이런 존재를 ‘개별화의 원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나’는 오로지 ‘나로’로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는 것에만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나’와 함께할 수 있는 존재를 신으로 간주하든, 타인으로 간주하든, 자기 자신으로 간주하든 상관없다. 아니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17%)

 

‘끝’은 사람의 문제이다

 

시간과 공간의 원리는 현상의 원리이고, 현상의 원리는 개별화의 원리가 되며, 개별화의 원리가 사람의 원리가 되고 또 결국에는 삶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복잡하게 들리지만 본질은 하나에 불과하다. 공식을 이해하고 나면, 수많은 다른 숫자들이 문제로 나서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더하기의 원리를 깨닫고 나면 아무리 숫자가 복잡하게 바뀌어도 그 원리에 맞춰 정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사람은 인식할 수 있다. 사람은 깨달을 수 있다. 다만 그 깨달음의 순간은 끝에서 실현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끝은 철학적 문제이다. 사실 자연 속에서는 끝이란 것이 없다. 끝은 오로지 사람의 문제이다. ‘끝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뿐이다. 끝을 아는 자가 시작도 할 수 있다. ‘자, 지금부터다!’라고 말하면서 전의를 다지는 것도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끝낼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19%)

 

시간은 여유 속에서 주어진다

 

아쉬움이 남는 삶은 극복되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자기변명이나 자기합리화로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없던 숙제도 만들어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삶의 숙제는 죽을 때까지 주어질 것이다. 창조적인 정신은 어떤 식으로든 기어코 숙제를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인연을 인식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실수는 하지 않기 위해서 두 눈 부릅뜨고 살아야 한다.

(중략)

거울 앞에서도 너무 가까우면 자기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시력이 가장 이상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리가 있듯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서도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거리가 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힘을 쓸 수 있다. 옴짝달짝하지 못하면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말 것이다. 늘 시간이 문제이다. 항상 시간 속에 인연이 있다. 언제나 시간은 여유 속에서 주어진다. (21%)

 

운명과 마주하는 일

 

끝까지 견디다 보면 한계를 알게 된다. 노력을 거듭하다가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마음이 들 때, 사람은 누구나 한계에 도달한다. 공자는 삶에서 한계에 직면하는 나이를 오십 세로 보았고, 그 나이를 일컬어 ‘지천명’이라고 했다. 하늘이 내려준 운명을 안다는 뜻이다. 삶을 오십 년쯤 살아보면,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일게 된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인식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십 세가 훌쩍 넘었는데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감도 못 잡는다. 하물며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육십 세가 ‘이순’이라고? 무슨 말을 들어도 다 알아듣는 나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나이가 되면 무슨 말을 들어도 기분이 잘 상할 뿐이다. 감정이 쉽게 뒤틀리고, 그러면서 쉽게 흥분하고 분노하기 일쑤이다.

사람은 깨달아야 한다. 자기 운명과 마주쳐야 한다. 운명과 마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계에 직면하는 일이라서 고통이 따른다. 한계는 자기 자신만의 것이라서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오롯이 혼자서만 감당할 수 있고 또 혼자서만 극복할 수 있다. 운명과 마주하는 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공자도 ‘지천명’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누구나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 즉 스스로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는 지경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운명’이란 것이 다가온다. 운명이 엄습하면 모든 것은 인식의 빛 아래 놓이게 된다. 그 빛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 운명이 삶의 주체가 되고, 인간은 그 운명 앞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지만, 그 운명이 ‘우리를 거칠게 움켜 잡고’ 우리를 가르칠 것이다. (22%)

 

본질을 흐리는 가짜 운명

 

운명이 아니면서 운명 행세를 하는 개념들이 너무도 많다. 정해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 외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발생한다. 이런 경향을 설명하는 개념이 ‘고정관념’이다. 그런 관념에 빠진 자는 자신의 생각이 운명인 듯이 판단하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개선할 여지가 있다. 자기 자신이 그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23%)

 

하나의 의견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너무도 많다. 자기 자신의 고집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 일상을 채운다. 자기 자신의 운명 속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가련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자존심만 세져서 타인을 배려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 정신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면 쉽게 흥분하고 심지어는 분노까지 하게 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27%)

 

결국 누구나 혼자이다

 

고독은 즐겨야 한다. 외로움에 시달려서는 안 된다. 외로움이 엄습할 때 자기 자신을 지켜주는 비결도 연습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지만, 혼자라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인식하기보다 낙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비결을 반복적으로 훈련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마음은 쉽게 다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서 마음을 지키는 훈련은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

(중략)

인생에는 갈림길이란 것도 존재한다. 시간은 늘 선택을 강요한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미련을 갖기보다 가야 할 길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운명이라고 인식되면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29%)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다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든 것은 1965년의 일이다. 그 뮤지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래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꿈’은 이룰 수 없어도 포기할 수 없고, ‘싸움’은 이길 수 없어도 도전으로 맞서고, ‘슬픔’은 견딜 수 없어도 웃음으로 바꾸고, ‘길’은 험해도 돌아설 수 없어서, 오로지 ‘정의’만을 위해 싸우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인간은 쓰러질 것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버텨도 어쩔 수 없이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인간은 부족하다. 부족해서 인간인 것이다. 부족함이 없다면 신이라 불렸을 것이다. 독일 속담 중에 ‘실수는 인간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물론 실수 전체는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실수를 경계하면 사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삶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30%)


 

4장 어둠 밤이 되어야 별이 보인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어선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논리로 살아간다. 뒷담화하는 것도 같은 논리에서만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흉허물을 이야기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스스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처방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뒷담화는 스스로도 뒷담화의 희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소름이 끼치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32%)

 

모든 인생이 고통인 이유

 

모든 인생이 고통인 이유는 노력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의 소리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다. 살고자 할 때 직면하는 현상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꿈이 무엇인가? 사람은 이런 질문과 함께 성장을 거듭한다. 안 되는 것이 먼저이고, 부정적인 인식이 먼저이다. 불행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행복이 주어지는 것이다. 비극이 먼저이고, 그런 다음에 비극적 인식이 주어지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라고 부르든 쾌감이라고 부르든 정화라고 부르든 이름은 상관없다. 그 이름이 전하는 메시지를 알아주면 되는 것이다. (35%)

 

이성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

 

아이들은 모두 어둠을 싫어한다. 잠을 자야 할 때조차 불을 켜두기를 바란다. 눈을 가진 존재의 문제 상황이다. 어둠 속에서는 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눈을 가졌는데 볼 수가 없다는 것이 불안을 조장한다. 마찬가지로 이성이 있는데 그 이성이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펼쳐지면 사람은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예상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공포가 엄습해올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이 공포에 휩싸이면 답이 없다. (36%)

 

자기自己 자신自身과 자신自信

 

자신감은 미덕이다. 그것은 소위 도덕적으로 바르고 아름다운 일로 간주된다는 얘기이다. 사람에게 자신감이 미덕이 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감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감을 미덕으로 삼지 못하고 유행이나 시대정신 혹은 풍습이나 관례 뒤에 숨어서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감이 미덕임을 알고 있어도 그 자신감을 타인을 위해 발휘하려는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리 속에 있으면서 위로를 찾는다. 다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자기 생각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한 자에게 머리를 숙이며 생명을 보장받으려 하고, 강한 권력에 복종하며 자기 존재를 인정받으려 한다. 그런 것을 삶의 지혜로 삼으며 스스로 위로를 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살아도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서 허망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한 심사는 스스로 죽음 직전에 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한 판단과 판정도 또한 스스로 내려야 하기 때문에 결코 만만찮은 순간이 될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아갈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속이며 죽을 수는 없는 법이다. 자기 자신이 진심을 아무리 속인다 해도 자기 자신은 속인 부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38%)

 

눈의 본성, 사람의 문제

 

동물에겐 비가 오면 그냥 비가 온다는 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은 없다. 하지만 사람에겐 비가 오면 ‘좋다’ 혹은 ‘나쁘다’로 구분이 되고, 그 구분조차 천차만별의 다양한 수준으로 나뉜다.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다, 싫을 때도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다. 이유도 다양하다. 사람은 자기 취향에는 민감하지만 남의 취향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감감하거나 너무도 잔인하기 짝이 없다. “넌 왜 그러냐?”하고 핀잔을 줄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40%)


5장 고통 이 세상이 사바세계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

 

‘세상이 나쁘고 악하다’, ‘그래서 살기 힘들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반대로, ‘즐겁게 살고 싶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런 마음이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목적지를 형성하고 있다. 사람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일수록 현실 속에서는 요원한 것이 된다. 사람들이 천국에서의 영생을 그토록 원하는 것은 현실 속에서 지옥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또 삶보다는 죽음을 직면하고 살아야 하는 절박함과 위기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문제는 사는 것이지 죽는 것이 아니다. 죽고 싶다는 말 자체도 살고 싶은데 살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자살자에게 공통된 현상은 살고 싶은데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죽음만이 문제의 해결이라는 생각이 자기 자신의 목숨에 손을 대게 한다. 죽음이 열쇠라고 생각이 이토록 위험한 것이다. 사는 동안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죽음에 손을 내밀라는 얘기는 아니다. (42%)

 

우연은 고통이며 행복이다

 

우연의 존재는 필연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필연이 없는 곳에서 우연은 등장할 수가 없다. 법이 있는 곳에 불법이 등장할 수 있는 상황과 같은 원리이다. 법이 없다면 불법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연과 필연은 같은 사물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연은 괴물이 될 수 있다. 모르고 당하면 지옥을 경험할 수도 있다. 괴물이 다가오고 있다. 그 괴물이 우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을 뿐이다. 사람의 삶은 괴물과 마주해야 하는 미로와 같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미로 속으로 들어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고 그 운명을 외면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운명은 자기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이 있기에 사람의 삶도 가능하다. (43%)

 

“지적질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 그것이 지혜이다. 참으로 실천하기 힘든 요구사항들임에 틀림 없다.

(중략)

‘지적질’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지적질’로 사람을 고칠 수도 없다. ‘지적질’은 지적하는 사람의 마음조차 불편함에서 해소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지적질을 했다는 사실에 대한 생각이 자기 자신을 괴롭힐 수도 있다. 지적질을 통해서는 결코 상대로부터 자신이 원했던 반응을 끌어낼 수 없다. 지적질은 자석의 상반된 힘처럼 서로를 밀쳐내는 데에만 효과적이다. (49%)“


6장 죽음 생로병사가 깨달음의 숙제이다

 

해석된 세계에서 벗어나는 용기

 

창조는 악마의 정신이다. 창조는 ㅇ악한 의지의 결과물이다. 복종하고 추종하는 정신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말 잘 듣는 정신으로는 꿈도 못 꿀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신의 손을 뿌리침으로써 실현된다.

(중략)

죽을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있어야 한다. ‘손에 무기를 든 채 죽는 것’이 바로 인생이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죽지 말아야 하는 건, 삶이 곧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다. 온 세상이 나를 죽이려 달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나의 적이다. 이 세상이 생지옥이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자, 그 자가 영웅이다.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삶을 선택한 자가 거인이다. (55%)

 

삶의 문제는 사는 데 있다

 

죽음 뒤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죽느냐 사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깨달음은 그저 요원할 뿐이다. 죽음 뒤의 문제를 신앙으로 해결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신앙은 죽은 뒤에 작동할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진정으로 살고 싶다면 삶의 현장에 마주 서는 용기, 즉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과 맞닥뜨려야 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58%)


3부 나를 가둔 틀에서 벗어나기

 

7장 행복 행복과 불행은 생각하기에 달렸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삶을 연습과 반추로 채운 자는 늘 발전의 계단 앞에 서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불만과 불평을 쏟아내는 자와 상관이 없다. 연습과 반추를 원하는 자는 현실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원한다. 더 나은 것을 알기에 그 앎을 실현시키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한다. (61%)

 

삶의 속도와 온도

 

다 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배우려 하기보다는 가르치려 든다. 입만 열면 가르치려 든다. 입만 열면 훈계를 한다. 대화는 사라지고 잔소리만 늘어난다. 사랑은 요원해지고 허영심에 찬 험담만이 입에 가득찬다. 그런 말들이 시간을 더욱 빠르게 흘러가게 한다. 남을 향해 욕을 하면 할수록 시간은 더욱 빨리 흘러간다. 그런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은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중략)

삶의 시간은 가속도가 붙는다. 늙으면 늙을수록 시간은 빨라진다. 엊그제가 새해였던 것 같은데 벌써 연말이다. 이런 말이 논의 소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시간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굴러 떨어지는 공처럼 가속도가 붙어서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추락한다. (62%)

 

부정적인 인식 다음이 중요하다

 

부정적인 인식이 지속적으로 전해질 때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관건이다. 인생은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철학의 진의를 깨달아야 한다. 그런 말이 힘을 발휘할 때까지 견디는 것이 문제이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말한 순간, 독서를 멈추면 잘못된 인식만이 생각을 지배하게 된다. (중략)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걸린다. 불행에도 시간이 걸리고, 행복에도 시간이 걸린다. 불행이 닥쳤을 때 과거를 되돌아보며 그 지경에 처해진 과정을 곱씹어보며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는 인식을 얻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 걸어온 길을 알고 나면 그 길을 피할 수도 있고 다시 선택할 수도 있다. 좋은 길이라면 기억하고 또 기회가 되면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에 해당할 것이고, 나쁜 길이라면 그 또한 기억하고 명심해서 또 그 길과 마주했을 때 그 길을 피해 가는 것이 지혜에 해당할 것이다. (65%)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는 것을 원하기 보다는 정답을 원한다. 공부를 원하기보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보다 시험에 나올 문제를 아는 것이 중요시 한다. 그것만 알면 행복이 보장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착각이다. 그런 앎은 삶의 무게를 더할 뿐이다. (67%)

 

허망함을 알아야 희망이 의미 있다

 

‘시간과 공간은 무한한데 개체는 어느 면에서나 유한하다.’ 이것이 인식되어야 한다. 이것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라는 질문을 품고 출가를 선택했듯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과 개체의 유한성이라는 대립 구조를 품고서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유한성은 현상과 그리고 무한성은 본질과 연관한다. 이 연관 속에 사람의 삶이 존재한다. 그 존재를 이해해야 희망이 생긴다. 그 이외의 상황에서 가지는 희망은 그것이 어떤 희망이든 간에 헛된 희망이 된다. (70%)

 

늘 경계하며 살라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아야 한다. 매순간 존중할 것을 찾고, 매순간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으며, 매순간 헛된 기대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검증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염세주의적 발상이고 염세주의적 사고방식이며 염세주의적 사고체계인 것이다. 이 세상에 믿을 것은 하나도 없다. 늘 경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늘 신중하게 사물을 대해야 하는 것이다. (73%)

 

인식과 의지는 늘 공존한다

 

인식도 의지도 모두 사람의 문제이다. 인식과 의지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하면서도 사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중략)

그런데 사람에게 있어서 인식은 인식 자체로만 머물지 않는다. 인식은 늘 의지와 공존한다. 인식과 의지는 서로의 조건이 된다. 인식이 먼저냐 의지가 먼저냐, 늘 사람들은 이런 식을 정답을 요구한다. 하지만 무엇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다. (79%)

 

엉터리 철학이 난무하는 시대

 

정해놓고 공부하는 것은 다 중세적 발상이고 신학적 논리이다. 그런 식으로 틀에 박힌 이야기만 들려주는 것은 진정한 철학이 아니다. “넌 왜 그러냐?”, “그래선 안 되지!” 하는 말들이 들려주는 소리는 정해진 기준이 있다는 폭력적이고 독단적인 소리뿐이다. 그런 소리가 기준을 형성하게 될 때 잔인한 종교재판이 가능해진다. (중략)

세상에는 ‘엉터리 철학’이 너무도 많다. 쇼펜하우어 시대에는 신학을 하면서 철학을 한다고 거들먹거리던 학자들이 너무도 많았다. ‘유해한 생각’을 퍼트리면서도 자기 자신의 실수를 깨닫지도 못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은 가르침을 주는 주체라고 판단하며 엄숙하게 분위기를 형성하고 연출하지만 그곳에서 전해지는 가르침은 독단과 독선이 아닌 소리는 전혀 들을 수도 없는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교실이 예배당으로 돌변하고, 대학 강단이 교회가 되는 현상 앞에서 쇼펜하우어는 할 말을 잃고 만다. (83%)


10장 해탈 멀리 떠나라 그리고 나의 별이 돼라

 

사람이 속는 이유

 

생각하는 존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의 생각에 갇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얽매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악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것을 두고 악인의 마음에 마야의 베일이 짙게 드리워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마음 같지 않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마음이 있다. 지극히 사심으로 가득 찬 존재들이 있다. 그런 마음이 이끄는 인식은 고집만 내세운다.

맹목적인 사람은 당해낼 수가 없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은 전혀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고 타인을 설득하려는 의지로만 세상을 살아간다. 이런 인식과 의지가 사람을 악으로 만든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타인의 삶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엄청난 손실을 초래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런 맹목적인 상태가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87%)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88% 페이지의 격언(전자책)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88% 페이지의 격언(전자책)

누구나 이성 때문에 가면을 쓴다

 

세상은 변했다. 육체에 대한 생각이 변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이성 때문에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이성 때문에 거짓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의도치 않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상대를 해코지하지 않는다면 거짓말도 좋은 일이다. 대부분의 창작물은 사람을 속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상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거짓말도 권장할 만한 것이다. 꿈과 희망을 주는 대부분의 작품은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과거 선배들은 진리를 말한다면서 종교재판을 일삼았다. 생각을 틀에 박아놓고 사람을 판단했다. 자기 생각이 옳다면서 상대방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정죄하기 바빴다. 진리로 사람을 죽이려는 양심에 사로잡혀 양심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했다. 양심을 진리의 주변에 두고 나니 사람 죽이는 것은 식은 죽먹기보다 쉬웠다. 진리를 운운하며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진리를 독점한 단체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90%)

 

내 인생의 가면들

 

‘가장무도회’는 끝날 것이다. 이성이 빛을 잃으며 삶도 끝날 것이다. 의도했던 의도치 않았든 가장무도회는 삶과 함께 진행될 수 밖에 없고, 그 가장무도회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담당할 수 밖에 없다. 누구를 만나든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진심이다. 그의 좌우명은 이랬다. “아무도 해치지 말고, 모두를 도와주어라, 네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이것이 염세주의 철학을 낳은 염세주의 철학자의 작은 소망이자 원대한 꿈이었다. 그는 한평생 이런 말을 해주려고 철학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90%)

 

현상과 본질은 공존한다

 

너무 늦지 말아야 한다. 깨달음의 순간을 죽음 직전으로 몰고 가지 말아야 한다. 현상 뒤에 본질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절반의 인생이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대립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본래 철학의 주제’이며, ‘플라톤이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현상에서 동일한 것을 인식하고, 유사한 것에서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조건’이라고 했다.

현상과 본질은 공존한다. 둘이 모여야 가장 큰 세상이 완성된다. 아쉽게도 플라톤의 본질은 선택하고 말았다. 그런 선택의 결과로서 현상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본질에 가려져 홀대받고 있던 현상을 관찰했다. 현상의 의미를 거듭 추궁했다. 플라톤이 무시했던 현상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극복해보고자 했다. 본질이 배경으로 버텨주지 않는 현상은 속이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한계를 넘어 서려고 한 것이다. (91%)“

 

생각할 수 있겠는가?

 

쇼펜하우어의 주옥같은 말들을 징검다리 삼아 살펴본 이 책의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 절이다. 늘 이 지점에 도달하면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마지막 인용문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보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 바로 이 마지막 순간에 하나의 심각한 질문을 남겨놓고 싶다. 의미심장한 질문이길 바란다. 물론 의미는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 되기도 한다.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으로 한참 동안 머물러 있길 바란다. (95%)

 

생각으로 무에 도달할 수 있다

 

죽음 이후는 그냥 마음의 문을 열어두면 될 일이다. 모든 것이 되기도 하고 무가 되기도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로 마지막 순간에 대해 마음의 준비와 훈련을 해두면 될 일이다. 무엇이 닥치든 감당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죽음 이후도 멋진 여행으로 인식될 것이다. 자식에게 행운을 주고 바다에 보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는 자기 자신의 자식에게 행운을 빌어주며 바다로 향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면 될 일이다. (95%)

 

책 속에서 알게 된 단어

1. 호모 메타피지쿠스: 형이상학적 인간

2. 측연추: 원추형 추를 가는 실에 매단 것으로, 공작물의 수직여부를 측정하거나 기계를 설치할 때 등에 사용된다. 또는 배에서 바다의 깊이를 측정할 때 던져 넣는 납덩어리

3. 판Pan: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목축의 신이자 목동의 수호신

4. 군서 본능: 무리지어 살려고 하는 본능

5. 다이모니온Daimonion: ‘다이몬과 같은 것’이라는 뜻, 대개 금지의 형태로 나타나는 내적인 신의 소리나 마음 속으로부터의 경고를 의미한다

6. 에움길: 굽은 길, 에워서 돌아가는 길

7. 므네모시네Mnemosyne: 그리스 로마 신화의 기억의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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