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the road rise up to meet you,

And may the wind be always at your back.

0500_독서

생은 아물지 않는다(이산하)

겨울밤 2024. 4. 6. 12:16

생은 아물지 않는다

《생은 아물지 않는다》(전자책) 표지
《생은 아물지 않는다》(전자책) 표지

제목:생은 아물지 않는다

지은이:이산하

 

출판사:마음서재

 

독서일:2024.4.4.~2024.5.

페이지:

ISBN13:9791165342869

소장여부:대출(전자책)

202423번째 독서


독서배경

43일 어제 오랜만에 내 블로그 구독하시는 분의 블로그에 구경을 갔다. 늘 수준 높은 서평을 포스팅하여 많이 배우는 느낌이 들었다.

 

일과 중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제주 4.3 사건 추모식에 정치인 불참과 같은 제목의 뉴스를 클릭도 하지 않고 무심히 넘겼는데, 그분의 블로그에 4.3 사건과 관련된 책이 포스팅되어 있어 천천히 읽어 보았다.

한국 근·현대사는 늘 슬프고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이 든다. 외세와 국가, 가진자의 폭력 앞에, 그 순간 그 자리에 내가 없었다는 것뿐이지,,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감, 당혹감과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하루가 지나, 전자책 도서관에서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는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하여 세상을 뜨겁게 달군 이산하 시인의 아포리즘이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읽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은 아물지 않는다》(전자책) 속표지
《생은 아물지 않는다》(전자책) 속표지

표지

표지는 상단의 연녹색에서 하단으로 진홍색으로 변하는 그라데이션 배경 중간에 흰색 세로 글상자 속에 생은 아물지 않는다제목이 세로로 쓰여져 있다. 흰색 세로 글상자 속에 흑백 담채로 이름 모를 수풀이 조금 그려져 있다.

 

책표지 띄지에 어느 생이든 내 마음은 늘 먼저 베인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책 설명 문구로 숨결과 숨결을 모아 물결을 만들어내는 한라산시인이 쓴 111편의 아포리즘이 적혀 있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92461190

 

생은 아물지 않는다 - 예스24

“어느 생이든 내 마음은 늘 먼저 베인다”숨결과 숨결을 모아 물결을 만들어내는‘한라산’ 시인이 쓴 111편의 아포리즘『생은 아물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는 장편

www.yes24.com

 

대출전에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이 책을 조금 살펴보았다.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진짜배기 에세이’”라는 출판사의 서평처럼 시대를 보는 저자의 절절한 마음이 내 마음은 늘 먼저 베인다라고 표현한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책을 펼쳤다.

   

저자

전자책 내에는 저자 소개 페이지가 없었지만, 전자책 도서관의 책 설명 페이지에는 저자 소개가 있어 참조하였다.  

1960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나 부산 혜광고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필명 ‘이 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해, 그해부터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다. 1987년 ‘제주 4·3항쟁’의 학살과 그 진실을 폭로하는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석방 이후 10년의 절필 기간에 전민련과 참여연대 국제인권센터 실행위원, 국제민주연대 인권잡지 《사람이 사람에게》 초대 편집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인권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저서로는 시집 《악의 평범성》 《한라산》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성장소설 《양철북》, 산사기행집 《피었으므로, 진다》 《적멸보궁 가는 길》, 번역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프리모 레비 지음) 《체 게바라 시집》(체 게바라 지음) 등이 있다.” 라고 전자책 도서관의 저자소개에 쓰여 있다.

왠지 민주화 시대 이전 치열하게 살아오신 길이 느껴진다.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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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부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페르시아의 흠  

  가만히 있으면 죽어!

  가장 아름다운 정원

  가장 위험한 동물

  특이한 메뉴

  나무가 나무에게

  늑대의 탐욕

  ‘비교’라는 단어

  개구리 왕국

  닭과 옥수수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멀리 있는 빛

  빠삐용 의자

  행복지수

  양심의 모서리

  세월호 창문을 부순 학생들

  큰 새는 작은 새를 등에 업고 날아간다

  찢어진 고무신

  아우슈비츠의 생존비결

  오리 다리는 짧고 학의 다리는 길다

  조선시대의 양아치들

  죽은 자의 히아신스

  판사는 시인이고 판결문은 시다

  행복에 대한 예의

 

2부 새는 바람이 강하게 불 때 집을 짓는다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나이테

  눈물 젖은 추억

  늘 약자 편에 서는 학교

  우분투

  독수리 이야기의 진실

  러시아 볼가강의 접시닦이

  먼지의 무게

  맨발

  문어의 부화

  불가능한 것

  빗방울 여행

  삐딱하게 크기

  사람은 다치지 않았느냐?

  산수유 씨앗 - 전우익 선생의 휠체어를 밀며

  선생님의 사랑

  성년식

  새는 바람이 강하게 불 때 집을 짓는다

  새의 부화

  숨은 꽃

  “시간이 걸려”

 

3부 아이는 한 번 죽지만 엄마는 수백 번 죽는다

  ‘갑자기’라는 표현

  강의 인권

  국가의 수치

  그리고 서로 괴물이 된다 - 불편한 과거사

  영혼의 토지

  나를 밟고 가라

  ‘시인의 경지에 이른 과학자상’

  내 집의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두 개의 학생증

  두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상’

  신은 어디에 있느냐?

  점

  라면을 훔친 죄와 나라를 훔친 죄

  생각하지 않은 죄 -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아이는 한 번 죽지만 엄마는 수백 번 죽는다 - 세월호 희생자 이혜경 학생의 엄마 유인애 씨의 시집

  아프리카 지도

  류시화 시인과의 편지 대화

  여기가 로도스다!

  마음의 감옥

  영혼의 무게 21그램

  우리를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운명의 주사위놀이

  운주사 와불 옆에 누워 서로 이를 잡아주며

  이것이 인간이다

  잔인한 실험

  장례식의 민영화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진실의 돛대

  진짜 지식인과 가짜 지식분자

  체 게바라의 공평

  촛불을 패러디한 시

  토끼 훈련

  세잎클로버

  필경사 바틀비처럼

  한라산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

  3퍼센트의 마음

  마지막 바이올린 연주

  미친 시간

  비유의 상처

  석유에 불타는 성경책

 

4부 영혼의 목걸이

  낡은 악기

  양심의 거울

  불일암의 동백꽃

  “외로워지기 위해 유럽으로 떠난다”

  용서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대신 아파해 줄 수 없는 마음

  영혼의 목걸이

  모래 만다라

  가장 낮은 자리에 가장 높은 평화가 있다

  손가락 끝의 영혼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종소리

  가장 아름다운 돌

  “손이 없으니까 발로 쳐요”

  야매 미장원의 짜장면 한 그릇

  어린 왕자의 행복

  영혼의 금메달

  울음은 뼈를 드러내는 일

  일상의 괴물

  조르바처럼

  첼로

  하늘로 날아간 물고기

  햇빛 때문에 자살하지 않았다

  행복한 삶의 비밀

  친구

  히말라야의 눈표범

감상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아포리즘이 뭔지 궁금해졌다.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과 같은 책도 지나가며 본 것 같은데, ‘아포리즘의 정확한 뜻을 알아보았다..

  • 아포리즘aphorism: 짧고 단순하면서도 진리를 드러내는 말. 격언, 잠언, 경구

《생은 아물지 않는다》(전자책) 첫 페이지(3/143)
《생은 아물지 않는다》(전자책)  첫 페이지(3/143)

 

책의 첫 페이지는 생은 아물지 않는다제주 4.3 70주년 추념식에서 사회자 이효리 가수가 낭송한 시로 시작한다. 책제목이 여기서 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책 속의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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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15/143) 나무가 나무에게

오래전에 잘린 나무 그루터기가 살아 있는 이유는 주변 나무들이 그루터기 뿌리에 자양분을 공급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너도밤나무들이 왜 이 그루터기에 생명을 유지해주고 있을까. 자신의 소중한 영양분을 경쟁자한테 나눠주다니……. 독일의 숲 해설가인 페터 볼레벤Peter Wohleben의 책 《나무의 비밀스러운 삶》에 그 이유가 자세히 나온다. 나무들도 서로 영양분을 나누지 않으면 더 빨리 죽고 죽은 나무도 금방 썩어 숲에 구멍들이 뚫린다. 그럴 때 태풍이 오면 옆의 나무들도 쉽게 쓰러져 죽는다. 그래서 모든 나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자산이다.

(중략)

나무도 사람도 살아가는 방식은 거의 차이가 없다. 숲에 구멍이 많으면 폭풍우로 나무들이 무너지고 사람의 가슴에 상처가 많으면 정신도 몸도 무너진다. 인생의 폭풍우를 버텨내지 못하고 쓰러진다. 우리는 숲속 나무들의 은밀한 삶을 통해 더불어 사는 공동체 정신을 다시 배운다.

 

(17/143) ‘비교’라는 단어

(중략)

트라우마의 뿌리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이 ‘비교’라는 표현은 자본의 피를 먹고 자란다. 자칫 잘못하면 인성을 파괴할 수도 있는 독극물이 된다. 예술에서는 그 독성이 더욱 치명적이다. 비교라는 이름으로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세계가 얼마나 조롱당하고 멸시받으며 폐기 처분되었던가

내가 우리 국어사전에서 가장 먼저 추방해야 할 단어로 주저 없이 꼽는 것도 바로 이 비교라는 몰개념이다. 비교는 경쟁을 낳고, 경쟁은 전쟁을 낳고, 전쟁은 악마를 낳는다. 그리고 악마는 약자부터 잡아먹는다. 인간은 피리미드 같은 세상의 벽돌 한 장에 불과하다. 위에서 밟힐수록 더욱 아래를 밟는다. 가장 밑바닥의 벽돌이 가장 먼저 부서진다.

→ 타인과 비교에서 부터 불행이 시작되는 것 같다.  

 

(21/143) 멀리 있는 빛

매년 봄, 친구 기형도 시인의 기일이 다가올 때마다 그의 시 한 구절이 내 가슴을 저민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기형도, 〈물 속의 사막〉중에서

 

(중략)

열정과 희망을 모색했던 80년대가 저문 뒤 급격하게 밀려온 허무와 절망, 한국의 웬만한 시인들은 적당히 꿈과 희망의 복선을 깔며 정서적 타협을 할 때 그는 그런 위선과 기만을 거부했다.

우리 시대의 꿈과 희망의 90퍼센트가 자본의 덫이다.

→ 사실 지금 보이는 꿈과 희망의 대부분은 '돈'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23/143) 행복지수

(중략)

한국인들은 이제 모두 너무 지쳤다. 중산층은 정치에 지치고, 서민들은 경제에 지치고, 노동자들은 일에 지치고, 대학생들은 스펙 쌓기와 취업난에 지치고, 직장인들은 상사들에게 지치고,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지치고,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지쳤다.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지쳤다. 다들 너무 빨리 달리다 보니, 볼 것도 못 보고 누릴 것도 못 누리고 또 내가 어디로 와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또 돌아갈 곳도 없다.

 

바로 이때가 정체성의 혼란과 함께 스스로 분열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난 그 순간이 세포분열처럼 새로운 생성을 위한 계기가 되기를 거듭거듭 기도한다.

→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지쳤다...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또 돌아갈 곳도 없다... 슬프네요....    

 

2부 새는 바람이 강하게 불 때 집을 짓는다

 

(39/143) 나이테

흔히 나무의 나이는 나이테로 가늠한다. 그런데 아프리카 같은 열대지방 나무에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는 추울 때만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이테는 고통의 나이인 셈이다. 또 나무는 사람처럼 나이를 수직으로 쌓으며 먹지 않고 수평으로 평등하게 먹는다. 그 때문에 사람보다 오래 사는지도 모른다.

(중략)

사람의 나이는 고통을 이겨낸 나이테가 아니라 해마다 죽음의 대출금을 상환한 영수증이다. 그리고 ‘인생의 후회’라는 이자는 늘 연체된다. 올해도 본의 아니게 나이를 먹더니 이자율이 높아졌다. 내 몸의 나이테는 촘촘해지지 않고 자꾸만 느슨해진다.

→ '인생의 후회'를 최소화하라고 《나라는 착각》(그레고리 번스) 책의 전략이 생각이 나요.

 

(48/143) 불가능한 것

(중략)

무릇 가장 나쁜 세상은 표현을 할 수 없는 세상이고, 그보다 더 나쁜 세상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세상이다. 비록 헛된 꿈이지만 그 꿈마저 봉쇄된 세상은 단지 좀 더 넓은 감옥에 불과하다. 그동안 난 작가로 살아오면서 무엇이 불가능한지도 모른 채 수없이 헛된 꿈을 꾸었다. 더구나 문학은 과학이나 수학처럼 공식을 풀어 정답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도 정신적 가치를 잃지 않는 ‘상상 너머의 세계’가 너무 매혹적이었다. 하지만ㄴ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더 이상 헛된 꿈은 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몰랐던 게 다행이다.

 

(56/143) 새의 부화

새의 부화에서 보듯 하나의 세계가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나오려면 자신이 안에서 먼저 깨트려야 한다. 본인을 둘러싼 껍데기를 힘껏 쪼아야 밖에서도 함께 쪼아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모두 껍데기다. 하나의 껍데기를 깨면 날아오르기도 전에 또 다른 껍데기가 금방 나를 둘러싼다. 나는 힘들고 지친 나머지 튼튼한 날개가 없는 것을 탓하기도 한다. 그러나 날개는 새끼가 부리로 껍데기를 먼저 쪼듯이 내 안에서 돋아나는 것이지 누가 밖에서 선물처럼 달아주는 것이 아니다.

 

(57/143) 숨은 꽃

40대 후반의 J변호사는 어느 날 지인의 장례식장 문상을 마치고 나오다가 다른 빈소에서 유치원생 같은 아이의 영정사진을 보았다. 조문객은 아무도 없었고 아이의 부모 같은 젊은 부부만 상복을 입은 두 개의 섬처럼 적막하게 앉아 있었다. J변호사는 조용히 빈소에 들어가 아이의 영정에 분향하고 절을 한 뒤 상주인 부모에게 말했다.

“잘 모르지만, 지나가다 너무 가슴 아프고 안타까워 아이의 명복이라도 빌어주려고 들어왔습니다.”

 

50대 중반의 프리랜서 K는 어느날 자기 아내가 갑자기 긴 머리카락을 싹뚝 잘라버려서 깜짝 놀랐다. 아내는 친구가 항암치료 때문에 삭발한 다음 창피해서 외출을 못 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 ‘머리를 민 사람이 혼자 있으면 그 사람만 주목받지만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친구처럼 자르고 빡빡 깎아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그 뒤로 길거리든 백화점이든 늘 함께 다녔다. 아내가 비구니가 되는 줄 알고 매일 좌불안석이었던 K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중략)

요즘처럼 ‘공감’과 ‘배려’를 크게 강조하는 시대도 드물다. 그러나 대부분 먼발치에서 잠시 눈물짓고 짧은 시간 슬퍼하는 것으로 공감과 배려를 ‘소비해버린다.’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커피 브랜드를 마시는 것과 같다. 공감과 배려는 브랜드가 아니다. 소비도 아니다. 값싼 동정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작은 감동의 생산이고 그 생산이 모여 감동의 연대를 이룬다.

(중략)

내 가슴에 뜨거운 불꽃이 이는 것은 영화 속의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이처럼 숨어 있는 꽃들의 작은 감동들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의 인품과 마음이 진짜배기 공감이자 배려의 씨앗이다. 그 씨앗이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온다.

→ 진짜배기 공감과 배려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행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3부 아이는 한 번 죽지만 엄마는 수백 번 죽는다

 

(61/143) ‘갑자기’라는 표현

어느 깊은 산사에 돌계단이 있었다. 돌계단은 언제나 자신의 처지가 불만이었다. 하루는 돌계단이 잔뜩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법당 앞의 돌탑을 불렀다.

“이보시오, 돌탑 양반! 우리 둘은 똑같이 돌로 만들어졌는데 누구는 매일 발에 밟히고 누구는 높은 자리에 앉아 공양을 받다니, 이거 너무 불공평하지 않소?”

그러자 돌탑이 점잖게 말했다.

“당신은 고작 몇 번 정을 맞고 돌계단이 되었지만, 난 수백, 수천 번 정을 맞아 깨지고 깎인 후에야 지금의 모양이 되었소.”

고통 없이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열매를 맺기까지 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겨울 혹한을 이기고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물을 끌어 올리는 처절한 사투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중략)

진부한 말이지만 성장통 없는 성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법이다. 자연이나 사람의 아주 사소한 변화에도 그만한 아픔이 따른다. 그것이 돌계단과 돌탑이 서로 다른 이유이고 또 그들 각각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갑자기’라는 표현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64/143) 그리고 서로 괴물이 된다

2차대전 때 독일에 5년간 점령당한 덴마크는 해방이 되자 즐거울 새도 없이 큰 고민에 빠졌다. 나치가 덴마크 해변에 묻은 220만 개의 지뢰를 과연 누가 위험을 무릅쓰고 제거하느냐 문제 때문이었다.

(중략)

덴마크는 독일의 노인과 소년 포로들을 자살폭탄 부대로 만들었다.

폭행과 굶주림, 그리고 공포감 때문에 자살하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전쟁은 이미 끝났지만 해변의 포로들에게는 다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참혹한 일이 발생하는 중이었지만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듣지 않았다. 바다는 다 보고 다 듣고 있었지만, 여전히 침묵할 뿐이다.

(중략)

종전 후 평화로울 때에 어리고 병든 포로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일은 나치가 저지른 만행 못지않게 잔인했다. 그래서 이 지뢰 제거 사건을 다룬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이 개봉하자 덴마크 국민들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며 그토록 당혹스러워했는지도 모른다.

(중략)

사과받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남의 허물 열 개보다 내 허물 하나가 삶의 벼랑을 만든다. 이쪽 인간의 벼랑 끝과 저쪽 인간의 벼랑 끝이 마주 본다. 그리고 서로 괴물이 된다.

→ 이런 사건도 있었네요...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67/143) ‘시인의 경지에 이른 과학자상’

언뜻 모순형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미국에 이런 상이 있다. 과학 분야에서 문장력이 탁월한 저자에게 주는 상이다. 오래되었고 전통적인 상이자 노벨상 수상자도 4명이나 받은 상이다.

아는 것을 표현하는 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은 글쓰기 교육을 기본으로 한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필수과목도 문장수사학이었다. ‘글쓰기’는 기술이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일이다.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바라보는 눈의 깊이와 받아들이는 마음의 넓이가 생긴다. 많은 인문철학서가 말해주듯 현실을 꿰뚫는 통찰과 깊은 성찰의 힘은 글쓰기에서 출발한다. 글쓰기를 통해 숙성된 깊이 있는 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중략)

한국에서도 최근 들어 글쓰기 교육을 강조하고 있지만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게 아니라 겉핥기식의 기술만 번식하고 있다. 오늘, 어느 석좌교수가 쓴 과학책을 읽다가 혈압이 올라 곤욕을 치렀다. 조악한 비문의 장례 행렬이 이어졌고 나는 조용히 책을 쓰레기통으로 운구했다. 비록 AI의 ‘문장교본’이 나오기 전이긴 하지만 ‘시인의 경지에 이른 과학자상’이 유난히 부러운 하루다.

→  왠지 나의 블로그 글도 보시면 혈압이 오르실 것 같고 대노 또는 조용히 창닫기 하실 것 같습니다만.   

 

(71/143) 신은 어디에 있느냐?

(중략)

역시 루마니아인 작가 게오르규Gheorghiu는 신도 해결할 수 없는 시간을 ‘25시’라고 했다. 24시가 최후의 시간이라면 25시는 최후의 시간에서 한 시간 더 지나버린 시간이다. 어쩌면 앨리 위젤이 정작 묻고 싶었던 것은 “신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물음에 우리는 모두 대답할 의무가 있다.

 

“어제 침묵한 자는 내일도 침묵한다.”라는 그의 말이 다시 목에 가시처럼 박힌다.

→  "어제 침묵한 자는 내일도 침묵한다" 가슴에 깊이 박히는 말이네요. 

 

(72/143) 점

(중략)

물방울과 눈과 쌀과 별과 보름달을 외치던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자 모두 ‘점’이라는 문장부호로 통일되어버렸다. 세상을 괄호 속에 가두는 제도교육이 상상력에 마침표를 찍는다고 해서 모든 게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더 늦기 전에 문명의 점들을 야생의 벌판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98/143) 진짜 지식인과 가짜 지식분자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지식인들이 많다. 과연 그들은 진짜 바꾸고 싶은 것일까?

나는 간단하게 아래 두 가지 질문에 답으로 판단한다.

1. 가족을 뺀 현재의 모든 것을 지금 당장 포기할 수 있나?

2. 중산층 이하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폭탄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들 수 있나?

 

무엇을 바꾼다는 것은 기존에 있던 것을 없애고 빈 곳을 새로운 것으로 채워 넣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비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심으로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그대로 움켜쥔 채 남들만 포기하라는 얘기다. 우리는 그들을 지식인이 아니라 ‘지식분자’라고 부른다.

(중략)

그들도 안다. 자신들이 삐끗하면 사회 전체가 디스크로 휘청거린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것을 교묘히 악용해 출세를 도모한다. 그들이 애용하는 ‘가치중립’이란 말은 기득권의 열차에 편승하려는 목적으로 표현하는, 위선적인 지식인의 균형적 시각을 빙자한 변명에 불과하다.

→  책 속 내용 중 가장  제 맘을 뜨금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99/143) 체 게바라의 공평

(중략)

“식량이 부족해 배가 고플수록 분배에 더욱 세심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이다. 하물며 세상의 정의를 위해 싸우는 혁명가들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더욱 평등하고 공평한 정신이 필요한다.

 

사람은 빈부격차는 참아도 불공평함은 참지 못하고 차이는 수긍해도 차별에는 분노한다. 자존감을 직접적으로 저격하는 인격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100/143) 촛불을 패러디한 시

(중략)

이제 광화문 광장은 텅 비었다. 독재의 무기는 칼이고 자본의 무기는 돈이다. 칼은 몸을 베고 돈은 정신을 벤다. 우리는 몸도 베였고 정신도 베였다. 아직 우리는 이것밖에 안 된다.

 

앞으로도 우리의 입은 여전히 진보를 외칠 것이고, 발은 지폐가 깔린 안전한 길을 골라 걸을 것이다.

 

(110/143) 비유의 상처

(중략)

내 목에 걸린 가시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곰인형 눈알붙이기 같은 수준의 막노동일 같은 거.”

누가 봐도 비하하는 비유이고 당사자도 당사자의 가족이 들으면 속이 쓰릴 것이다. 다행히 평론가의 사과 댓글도 곧바로 달려 논란이 종식됐지만 난 이와 같은 비유가 일반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로 보였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면서도 작중 인물들의 대립각을 강조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계급적 위화감을 조장하는 비유들을 쓴다. 청소부 주제에, 노가다 주제에, 아파트 경비 주제에…… 등등 작품 속의 이런 비유들은 남산에서 무심코 던진 돌과 같아서 그 돌에 맞은 계급적 약자들은 치명상을 입는다.

강자를 공격하는 명분이 아무리 정의로울지라도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을 권리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가장 큰 약점은 자신이 약자임에도 강자로 착각하는 것이다. 작가가 유일하게 강자가 될 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자세로 글을 쓰는 결기의 순간 뿐이다. 사회적 민주화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의 언어적 민주화에는 작가들조차 너무 태만한 오늘이다.

 

4부 영혼의 목걸이

(114/143) 낡은 악기

오래전 한 바이올리니스트와 얘기하다가 머리에 불이 반짝 켜졌다. 그는 연주가 끝나면 언제나 바이올린 줄을 모두 느슨하게 풀어놓는다고 했다. 줄이 팽팽하게 조여진 상태에서 보관하면 미세하게나마 나무도 뒤틀리고 줄도 약해진다고 한다. 바이올린 줄도 사람의 신경처럼 섬세하고 예민해 그 미세한 차이로 음의 무늬와 빛깔이 변한다는 것이다.

(중략)

얼마 전 그 바이올리니스트가 낡고 오래된 바이올린을 새것으로 교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순간 나도 내 예민한 신경줄과 낡은 인생까지도 아예 교체해버리고 싶었는데 불가능했다. 인간의 삶은 교체할 수 없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것, 아무리 훌쩍 떠나 마음을 비워봤자 결국은 오래된 악기처럼 그냥 낡아가야 한다는 것, 안타깝게도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미련이 된다. 내 머리에 켜져 있던 불이 깜박깜박하더니 꺼져버렸다.

 

(120/143)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나이 드는 게 불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수록, 아무리 자신을 부숴도 인생이 그다지 특별해지지 않을수록 두 선배 작가들의 얘기가 떠오른다.

(중략)

한번 흘러간 물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 인생도 그렇다. 결코 삶이 남루하거나 덧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고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그것만큼 공평한 것도 없고 그것만큼 자유인것도 없다. 그동안 얼마나 아프고 힘들게 살아왔는데 다시 돌아가겠는가. 위의 글처럼 두 분은 젊어서 얻지 못한 자유로움을 늙어서 얻었다.

 

이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으로 홀가분한 노년의 삶, 더 이상 무엇을 얻으려고 자신을 부서거나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는 삶, 가을이 되면 꽃 핀 아름다움을 버려서 열매를 맺고 겨울에 그 열매마저 버림으로써 다가올 봄의 꽃을 준비하는 그런 겨울나무와도 같은 삶. 두 대문호는 겨울나무처럼 삶의 모든 잔가지들을 걷어내고 마지막 버린다는 생각까지 버리며 홀로 여위어가다 눈을 감았다. 그것이 자유고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는 글은 재밌습니다.  어차피 아무리 아둥바둥해도 다시 젊어지지 못하는 거니까 어쩔수 없지요.    

 

(122/143) 대신 아파해줄 수 없는 마음

 

“삶에 지친 그대여

조금만 더 인내해주기 바라오.

내가 그대에게 깊이 빠진 그 순간부터

그대의 따뜻한 생일을 맞은 지금 이 순간까지

지난 세월을 모두 잊은 채 내가 바치는

이 몇 줄의 시를 잠시 들어주기 바라오.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아 더욱 초조한 그대여

조금만 더 인내해주기 바라오.

지치고, 실망하고, 자책하고, 분노하면서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왔으니

그대 가슴이 얼마나 쓰라리고 저며왔겠소.

이제 더 이상 그대 혼자서만 앓고 시름하며

살지 않아도 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오.

그대 생일에 바치는 이 열네 줄의 축시는

그대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또한 그대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내 팔뚝의 수인번호처럼 증명하는

내 서투른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라오.

-프리모 레비, 〈아내의 생일〉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A6%AC%EB%AA%A8_%EB%A0%88%EB%B9%84 

 

프리모 레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리모 미첼레 레비(Primo Michele[주 1] Levi, 1919년 7월 31일 ~ 1987년 4월 11일)는 유대계 이탈리아인 화학자이자 작가로 여러 책과 소설집, 수필과 시 등을 집필했다.

ko.wikipedia.org

→ 덕분에 이런 분도 알게되네요. 시가 참 마음에 듭니다.

 

(124/143) 모래 만다라

(중략)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無想’과도 같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므로 모든 아름다움 또한 덧없이 사라진다. 우리는 우주의 가랑잎 위에 잠시 모였다가 흩어지는 모래알일 뿐이다.

 

(131/143) 어린 왕자의 행복

(중략)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난 더 행복해지겠지. 마침내 4시가 되면 진짜 어쩔 줄을 모를 테고. 행복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걸 느낀단 말야. 하지만 네가 갑자기 불쑥 오면 난 몇 시부터 내 마음을 예쁘게 꾸며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잖아.”

 

이제 세월이 이슥해져 이 동화를 다시 보니 20살 무렵에 책을 보다가 붉게 줄 쳐놓은 부분을 50대에 다시 읽을 때처럼 민망하고 무안해진다. 앞에 인용한 여우의 말만으로도 그렇다. 여우는 행복이 약속시간에 맞춰서 와야 하는 존재이고, 또 자신을 먼저 꾸미고 준비하지 않으면 행복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불안한 존재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행복이 외부 방문자라는 건 똑같다. 내가 여우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도 그것이다. 행복은 외부 방문자가 아니라 날개 같은 것이라고. ‘새의 날개처럼 누가 밖에서 달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살을 찢으며 나오는 것이라고.’ 준비된 행복은 준비된 눈물만큼이나 슬프다.

→  행복은 스스로 생각하기 나름인 거겠죠.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죠.  그래도 행복을 생각해야 겠죠.      

최종 감상

저자의 이야기를 담담히 읽었다. 크게 읽기 어렵거나 마음이 격해지는 부분은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30여 년 전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생각이 났다. 그 선생님의 (민주화 운동을 하셨는지, 전교조 소속이셨는지) 성향은 잘 몰랐지만, 표지 띄지의 저자 사진 속 모습이나 책 속 글로 말하는 느낌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조금 부끄러운 마음은 들었다. 진보니 보수니 정치적인 말들을 애써 모른 체하고 열심히 삶을 살아 왔다고 생각하지만, ‘가치중립이란 말과 함께 기득권의 열차에 편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았다.

 

저자의 일침으로, (만약 내가 그 열차에 타고 있는 쪽에 속한다면) 그 열차에서 뛰어내리거나 난 그 열차 안타고 있다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좀 민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엄혹한 시대를 용기 있게 꾸짖고 그만큼 핍박받은 저자의 이런 일침은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그냥 부끄러움을 아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거죠. 저는 저대로 열심히 후회를 최소화하며 살겠습니다.’라는 말로 마음을 대신한다..

 

그동안 읽었던 철학, 심리학, 문학 등 여러 책들은 나를 객관화했다면, 이 책은 스스로를 주관화하는 힘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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