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오후
제목:어느 작가의 오후
지은이:F.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neral)
엮은이: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
옮긴이:서창렬, 민경욱
출판사:인플루엔셜
독서일:2024.3.15.~2024.4.7.
페이지:364
ISBN13:9791168341494
소장여부:대출(종이책)
※2024년 24번째 독서
독서배경
지난 3월 중순 즈음에 일부러 도서관에 갔다. 2월 경에 이 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아마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파스칼 브뤼크네르)를 재밌게 읽고 마음에 들어서, 같은 출판사의 《뉴타입의 시대》(야마구치 슈)를 대출하기 전에 요즘 꽤 ‘인플루엔셜’ 출판사 책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아서, 출판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2024.01.30 - [0500_독서] -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파스칼 브뤼크네르)
제법 많은 책들을 취급하고 있었고, 그중 첫 번째 표시되는 책이 이 책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값과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인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 모음이니 출판사 책들 중에 제일 인지도가 높은 것 같았다.
전자책 도서관에는 잘 나가는 문학 작품은 잘 없는 편이어서 인지 이 책도 당연히 없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다니는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장서 조회를 해보니, 책이 있고 ‘자료 분류중’ 상태였다. 이 상태는 보통 도서가 도서관에 납본된 후 해당 도서관의 분류코드 부여와 열람실 서가에 비치하기 직전 상태였다. 곧 새 책을 대출할 수 있을 것 같아 ‘대출 가능’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하루에 한 번씩 도서관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책 상태를 확인하기를 계속하다 결국 2주 정도가 지난 3월 15일에 ‘대출 가능’으로 홈페이지에 표시되었다. 혹시 다른 사람도 이 책을 노리고 있을지 몰라 금요일 점심을 빨리 먹고 그 길로 도서관으로 갔다. 다행히 책은 분류코드대로 서가에 꽂혀 있었다. 이 도서관의 이 책의 첫 대출자가 되었군이란 마음과 함께 책을 들고 도서관을 나섰다.
표지
표지(사실은 표지가 아닌 표지커버)는 별도의 일러스트 없이 진홍색 단색 배경에 흰색선으로 삼단으로 나눠진 단순한 구성이다. 상단에는 금색의 글꼴색으로, 원작자인 F.SCOTT FITZGERALD와 편역자인 HARUKI MURAKAMI가 ‘×’로 묶어 함께 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 같다. 원작자가 편역자보다 2~2.5배 정도 글꼴 크기가 크다.
중단에는 책의 제목인 ‘어느 작가의 오후’와 이 책을 설명하는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이 적혀있다. 그리고 엮은이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밝히고 있다.
하단에는 위쪽에는 옮긴이의 성명과 아래쪽에는 출판사가 적혀 있다. 하단 부분은 도서관의 인식태그 스티커가 붙어있어서 옮긴이를 제대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표지커버 안의 진짜 표지는 검정색 배경에 ‘AFTERNOON OF AN AUTHOR’라는 황금색의 제목과 그 아래 붉은 색의 필기체 같은 꼬인 선 (피츠제럴드의 서명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모르겠음), 그리고 ‘F. Scott Fitzegerald Selected by Haruki Murakami’라는 황금색 문구가 적혀 있다.
책의 원제는 ‘ARU SAKKA NO YUKOKU-Fitzgeral Koki Sakuhinshu selected by Haruki Murakami’이다. ‘어느 작가의 저녁-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selected by 하루키 무라카미’ 정도로 해석된다. YUKOKU가 ‘석각夕刻(yuukoku)’로 저녁시간으로 알고 있는데,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 제목도 ‘AFTERNOON OF AN AUTHOR’이고 한국어판에서도 ‘오후’로 번역했는데, 왜 무라카미 하루키는 ‘저녁시간YUKOKU’를 썼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측으로는 일본어로 ‘오후午後gogo’는 대략 오후1~3시 정도까지 이른 오후를, ‘석각夕刻yuukoku‘는 오후 4~6시 정도의 늦은 오후와 초저녁을 포함하는 (보통 석간신문이 배달되는) 시간으로 구분한 것 같다. 그래서 작품에서 느껴지는 인생의 황혼과 비슷한 시간대인 늦은 오후의 용어를 선택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석각이란 용어는 잘 쓰지 않고, 저녁이라는 용어를 쓰면 좀 원제의 afternoon과는 뜻이 멀어지는 것 같아 ’오후‘로 쓰지 않았나 싶다.
저자와 역자
F.스콧 피츠제럴드는 미국 출신으로 1896~1940까지 살았다. 미국의 ‘재즈 에이지’와 ‘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문학적 천재’라는 찬사와 성공을 이루었다. 아내 젤다 세이어(젤다 스콧)와 함께 사교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과 아내 젤다와의 불화 등으로 인한 알코올 중독과 문학적 정체로 내리막을 향해 간다. 1934년 회심의 장편소설로 《밤은 부드러워라》를 발표했으나 당시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지는 못했다.(대신 작가 사후 문학적 재평가를 받았다고 알고 있다.)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다 1940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일본에서는 영미문학 번역가로도 유명한 것 같다.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챈들러, 레이먼드 카버, 트루먼 커포티 같은 작가의 작품을 일본어로 옮겨 재조명한 것으로 평가받는다”고 소개되고 있다. 왠지 성공한 작가의 자기만족과 흥미로 번역을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잊히기 쉬운 영미문학의 고전작가를 다시 발굴해 낸다는 점에서 출판계나 독자들 모두에게 좋지 않을까 싶다.
책에는 한국어 번역자들을 소개한 페이지가 없었다. 처음 책을 빌리고 나서 조금 헷갈렸다. 피츠제럴드의 후기 작품 영어 원작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해서 엮은 일본어판을 원문으로 하여,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낸 작품으로, 처음에는 편역자(작품을 뽑아서 일본어로 옮긴이)인 무라카미 하루키 말고 한국어 역자가 책에 표시가 안되었나 생각했다. 곧 도서관 스티커 때문에 한국어 역자분들이 가려져서 안보인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책 커버 날개의 양쪽에는 원작자 피츠제럴드에 대한 소개와 원편역자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설명만 나와 있다.
한국어 번역자가 2명인 것을 보니, 책의 소설 부분과 에세이 부분을 따로 번역한 건지, 아니면 소설 단편 일부와 에세이 단편 일부를 나눠서 2명이 번역을 한 건지 궁금해진다. 책을 읽을 때는 두 분의 한국어 번역 차이는 잘 못 느꼈다.
차례
소설
이국의 여행자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
크레이지 선데이
어느 작가의 오후
알코올에 빠져
피네건의 빚
잃어버린 10년
에세이
나의 잃어버린 도시
망가지다
붙여놓다
취급주의
젊은날의 성공
엮은이의 글 무라카미 하루키
차례는 단편소설 7편과 에세이 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나는 줄거리
이국의 여행자
젊고 아름답고 세련되고 나이에 비해 엄청난 부富도 이룬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한) 신혼부부가 다른 패키지 여행자들과 함께 북아프리카를 여행한다.
거기서 각 여행자를 관찰하며 부부간의 애정을 과시하지만, 아프리카 전통춤 공연장에서 신부와 신랑은 약간의 의견 충돌이 발생한다.
그 다음 남유럽 어딘가(기억이 잘 안남)의 호텔에서 장기 체류하며 미국식의 즐거운 삶을 추구하지만, 신랑이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파는 것이 신경 쓰이고 결국 부부는 폭발한다. 그리고 화해하고 파리로 향한다.
파리에서는 신부도 출산을 하고 파리 사교계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며 어느 정도 즐겁고 방탕한 삶을 보내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입고 스위스로 간다.
스위스에서는 조용히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지만 이미 많은 정신적 고난을 겪은 부부에게 식어버린 호기심과 잔잔한 애정만이 남아 있다. 거기서 처음 여행에서의 자기들처럼 도도하고 세련된 부부를 다시 발견하게 되고 그들에게 새로운 관심과 친근감을 느끼게 되지만... 마지막에 그들의 정체를 알고 깜짝 놀라며 마무리된다.
→ 여행의 시작 북아프리카에서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부부의 애정에 조금의 금이 생긴 것으로 느꼈다. 전통춤 공연장에서 신부는 신랑에게 선택권을 주고 신랑의 남겠다는 선택을 듣고 괜찮다고 말했지만 속상해서 돌아가버린 장면과 부담 없이 선택하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가는 데로 선택했는데 토라진 신부에게 화가 나지만 그래도 신경 쓰며 따라가는 신랑의 심리묘사가 생생하게 와닿았다. (100년전에도 남녀간의 심리는 이렇게 미묘했군요.) 남유럽 휴양지에서는 임신으로 안정이 필요한 신부를 두고 현지에서 사귄 친구들과 술에 빠지며 바람 초기 단계의 신랑 모습에서 이거 위험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신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신랑은 다시 시작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나 제법 그들에게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지만, 뜨내기 이방인 부부의 돈냄새를 맡고 뒤통수를 치는 사건에서 다이나믹하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스위스에서 요양에 가까운 생활(신랑은 알코올 중독 치료, 신부는 신경쇠약 치료)을 하며 지내며 지난 시간을 반성하고 다시 함께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그래도 주인공의 관계는 좀 특별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좀 영화적으로 시각화를 강조하거나나가거나 처음부터 미스터리 장르로 각색해서 써도 좋을 것 같았다.
피츠제럴드와 젤다는 화려하고 방탕한 시간을 유럽에서 보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크레이지 선데이
1930년대 헐리우드의 촉망받는 젊고 잘 생긴 시나리오 작가가 직장 상사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감독의 집에 초대를 받는다. 그곳에서 여배우 출신의 상사의 아내를 짝사랑하게 된다. 상사의 아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상사의 인간적인 신뢰 사이에서 고민한다. 상사의 아내도 젊은 작가에게 마음을 열고 대하며 유혹 아닌 유혹이 느껴진다.
상사도 아내와 젊은 작가의 미묘한 감정선을 잘 아는 것 같고 시험해 보려는 것 같다. 마지막 일요일 상사는 아내와 젊은 작가를 남기고 여행을 간다고 했다. 상사의 아내와 젊은 작가는 상사의 집에서 만났다. 그리고 여행 간 상사에게서 날아온 전보는 두 사람을 충격으로 가져간다.
→ 이거는 애정 영화 시나리오 같기도 하다. 상사와 아내의 쿨한 감정도 재밌다. 미국은 약 100년 전에 이미 쿨했네요. 1920~1930년에 현대 시대의 감정선을 갖고 있었군요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 속의 가족
왕년에 잘 나갔지만 지금은 술이 없으면 생활이 안 되는 중년 의사는 고향으로 돌아와 약국을 했다. 술 때문인지 의사로서 진료는 거의 하지 않고 약국 경영 위주로 살고 있었다.
고향의 동생네 집으로 가는 길에 어느 집에 들러 고양이를 좋아하는 6살 소녀에게 안부를 물었다. 동생네 집에 도착하여 머리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진 동생네 장남을 살펴보았다. 동네 의사는 이미 손 쓸 수 없다고 했었다. 의사는 수술하면 25%의 가능성은 있으나, 본인은 술 때문에 집도할 수 없고 수술 실패에 대한 원망도 듣고 싶지 않으니, 다시 동네 의사에게 집도를 요청하라고 하고 돌아선다. 동생네 제수씨가 부탁과 원망의 말을 한다.
의사는 동생네 장남을 모종의 사건으로 싫어했다. 의사의 집으로 동생네 차남이 쫓아와서 자기 어머니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며 위협한다. 의사는 차남을 잘 달래 집으로 돌려보낸다.
차남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토네이도에 휩쓸려 겨우 살아난다. 그날 저녁 고향 마을은 토네이도에 의해 쑥대밭이 되고, 의사는 마을 병원에서 동네 의사와 함께 토네이도 이재민을 치료하느라 며칠 밤낮을 전쟁통 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 후 마을을 돌아보니 큰 피해가 있었다. 동생네 집으로 가며 2차 토네이도에 휩쓸릴 위험에 빠진다. 어제 이뻐했던 6살 소녀도 아버지를 잃었고 동생네 집도 결국 2차 토네이도에 파괴되었다. 병원에는 동생네 장남도 실려와 있었다.
의사는 고향 약국을 정리하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동생네에 가서 화해를 하고, 이제 혼자가 된 6살 소녀를 찾으러 갈거라 생각한다.
→ 이것도 왠지 영화 시나리오 같은 느낌이네요. (대부분 소설이 영화화 가능한 걸 생각하면 당연한 생각이지만) 특히 동생네 가족과 의사와의 심리적 상태와 토네이도가 휩쓰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좋았다.
어느 작가의 오후
어느 작가는 아침에 일어나 오랫만에 생각보다 몸 상태가 좋아서 외출을 생각한다. 본인보다 집의 가정부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오전에 간단한 식사와 집필 업무를 하고, 오후에 2층 버스를 타고 시내의 풍경을 즐기며 추억을 떠올리다 단골 호텔 이발소에 도착한다.
이발소에서 편안한 샴푸 서비스를 받고 기분이 좋아져, 과거처럼 활동적으로, 좀 더 외출 활동을 이어갈까 고민하지만 언제 체력이 떨어질지 몸 상태가 악화될지 몰라, 다시 2층 버스를 힘겹게 올라타고, 그냥 별일 없이 다시 아파트로 돌아오며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 알코올 중독을 겨우 치료해서 쇠잔한 상태로 힘겹게 버티는 작가의 모습이 실제 피츠제럴드의 말년을 연상시키며 동일하게 느껴진다. 아직 정정한 나이일 작가지만 알콜 중독과 각종 상황으로 쇠약해질 데로 쇠약한 모습의 묘사에 측은하게 느껴진다.
모처럼 기분 좋은 오후, 쇠락해 가는 주인공과는 반대로 즐길 것 많은 도시, 20년 전 다녔던 대학가의 활기찬 에너지, 과거의 열정과 성공을 생각하며 시내로 가지만, 결국 나를 위한 작은 위로(이발소 샴푸 서비스)에 만족하고, 모든 화려한 시절을 먼저 다 보내고, 다 타버린 듯한 작은 웃음을 짓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애잔했다. 그래도 오전과 밤에 자신의 삶에 원동력인 집필 활동을 위해서 에너지를 쏟고 있는 (있을) 저자를 생각하니, 마지막까지 완전히 다 포기하지는 않았구나라는 조금의 희망적인 면을 발견해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 그리고 예전에 일본 취업 생활이 생각났다. 화려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금전적으로는 아쉬울 것 없는 시간이지만 혼자라는 생각,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삶의 활기가 조용히 꺼져간다는 생각이 떠올라, 괜히 감정 이입을 한 작품이었다.
젊은 날의 성공
저자의 에세이로 말년의 상황에 대해서 막힘없이 담담하게 적어 나가고 있다. "인생이 낭만적인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너무 이른 시기에 거둔 성공의 대가이다."는 저자의 주제 문장처럼, 자신의 성공과 화려한 날에 대해서 직접적인 후회나 반성대신 '요즘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정도로 담백하게 적혀 있다.
→ 이 책의 소설 및 에세이 작품에서 관통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화려했던 젊은 날은 가고 겨우 살아서 버틴다’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젊은 날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평생 그 자리를 머무를 수 없고 내려와야 한다. 하지만 천천히 완만하게 내려오는 것과 땅이 꺼지듯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은 다른 느낌일 것 같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요즘 아이돌이나 연예인 톱스타가 사건사고로 대중에게 미움받고 한 번에 잊혀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일 수 도 있다. 하지만 1930년대 작가는 자신의 필력으로 이런 상황을 글로써 남겼다. 거의 100년의 이야기인데도 격한 공감이 일어났다. 1920~1930년대 이미 완성된 미국, 뉴욕, 세련된 도시와 각종 자본주의 시장과 서비스, 그 속을 채우기 위한 재능과 엄청난 보상, 자유로운 남녀, 절제하기 힘든 유혹들 등 TV는 아직 없는 시절이지만 추가적으로 인터넷, 스마트폰 정도만 제외하면 현재의 우리 삶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만을 비추던 화려한 조명(함께 부와 명성도) 은 꺼지고, 대중에게 이미 스타로서 얼굴은 알려져 있어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기도 힘든 상황처럼, 저자도 이미 전성기는 지나 내리막이고 약간의 부활도 힘겹다는 걸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이제 큰 욕심 없이 나름 소박하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담백하게 살겠다는 주장인 것 같기도 하다.
원작자 피츠제럴드의 황혼이라고 하까 말년의 상황과 담담한 글 속에서 쓸쓸함과 연민이 느껴졌다. 젊은 시절 일반인들은 꿈꾸기도 어려운 최고의 자리에서 막대한 부와 명성, 관심을 얻은 사람인데, 내려오는 과정이 극적이라서 그런 건지, 나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져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최종 감상
보통 장편소설은 하루 이틀 만에 다 읽기가 힘들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제는 작품 속에 주인공으로 몰입하기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다.
책은 읽고 있지만, 마치 영화를 보듯이 ‘흥, 주인공 보정 많이 받네. 보통은 그런 일 (거의) 안 일어나지. 현실은 지독히 너에게(나에게) 무관심하다고.’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먼저 들며, 내가 왜 이 작품 속 세계관에 몰입하고 있나라는 현타가 자주 일어난다. 그래서 한 번에 다 읽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은 단편소설의 모음으로 시간 날 때 1시간 정도에 1~2편 정도 읽으며 다섯, 여섯 번 정도 책을 나눠 읽으니 쉽게 완독 했다.
책의 후기 단편소설과 에세이는 1930년대에 쓰인 작품이니 약 100년 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인물들의 심리묘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도시, 생활양식, 남녀관계, 직장 환경 등이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당시 미국 상황이 새롭게 느껴졌다. 또한 이런 현대적인 감각과 우울한 황혼기의 후회를 바탕으로 100년 전에 저자는 도시적으로 세련되고 고독한 작품을 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피츠제럴드 작가님 불쌍해요’ 이다. 빨리 찾아온 인생의 황혼을 그저 고독하게 담담하게 걷고 있는 것 같아 그 쓸쓸함이 공감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안 좋은3가지로 흔히 ‘초년 성공, 중년 상처喪妻, 말년 빈곤’이라고 들었는데, 원작가 피츠제럴드는 초년 성공과 중년 상처(에 준하는 간병), 말년 빈곤을 압축적으로 짧은 기간에 갖고 간 것 같다.
저자 소개 페이지에도 설명되어 있는
유명작가가 된 그는 과거 파혼당했던 상대인 젤다 세이어와 결혼에 성공한다.
(중략)
성공에 압도되어 술에 기대게 되었고, 신경쇠약과 우울에 사로잡힌 아내 젤다와의 불화. 그녀의 입원 등으로 고통의 날이 이어진다.
(중략)
생활고로 인해 할리우드로 옮겨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중략)
그는 작품을 미완으로 남긴 채 1940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처럼 초년 성공 이후 중년 상처(에 준하는), 말년 빈곤의 불행한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로, 이런 측은지심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엮은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통해 솟아난 문학적 감수성을 과거의 나의 상황에 대입하여 공감하고 증폭된 것이 아닌가라는 반대편의 생각도 들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비극 영화의 주인공도 되어 보지 못하고, ‘초년 성공’이라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불행한 삶과 마감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만약 피츠제럴드와 동시대, 동일한 사회에서 살았다면 톱 반열에서 조금 내려온, 그래도 나보다 더 잘 먹고 잘 사는, 작가의 이야기로 생각하지 않았을까라는 마음도 생겼다. 지금으로부터 10년, 20년 전에 최고 인기 소설 작가가 지금 뭐하고 사는 지 관심이 없는 것과 당시 벌어놓은 돈으로 알아서 잘 살겠지라고 넘기는 것 처럼 생각했을 것 같다.
피츠제럴드는 초년 성공으로 화려한 시절과 이름, 작품이라도 남겼으니 다른 보통 사람들 보다는 나은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말한다고 듣지도 않겠지만, 그리고 술 좀 적당히 마시지라는 일침도 해주고 싶다.)
결국 스스로 성공했다 교만하지 말고, 삶에 충실하며, 함께 있는 사람들과 작은 행복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0500_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파민네이션(애나 렘키) (19) | 2024.04.18 |
---|---|
중세의 미학(움베르토 에코) (34) | 2024.04.14 |
생은 아물지 않는다(이산하) (22) | 2024.04.06 |
나라는 착각(그레고리 번스) (25) | 2024.04.03 |
내가 빛나는 순간(파울로 코엘료) (27) | 2024.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