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제목: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원제:UNE BREVE ETERNITE:Philosophie de la longevite
저자:파스칼 브뤼크네르Pascal Bruckner
역자:이세진
출판사:인플루엔셜
독서일:2024.1.27.~2024.1.30.
페이지: 320
ISBN13:9791168340039
소장여부:대출(종이책), 대여(전자책)
※ 2024년 7번째 독서
독서배경
2023년 연말 한 해가 가는 게 아쉬워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 빌렸다. 그중에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책 상태가 깨끗했고,책 표지의 핵심 문장인 ‘세계적 지성이 전하는 나이듦의 새로운 태도’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좀처럼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새해부터 ‘밀리의 서재’ 등 전자책 앱을 접하고 나서는 태블릿을 통한 전자책 위주로 읽다 보니, 종이책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서관 대출 종료 기간이 다가와 읽지도 않은 책을 그냥 반납하기 양심에 찔려서 주말에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느 대출 받은 책처럼, 처음 30분 ~ 1시간 정도 집중해서 읽고 나서 방치하다가 반납일에 그냥 반납할 줄 알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하나하나의 토픽이 지루하지 않고 재밌었다. 토픽 속의 감동되는 문구를 필사하고 하다 보니 다 읽기도 전에 금방 반납 기간이 다가왔다.
전자책 앱에서 찾아보니 전자책이 있어, 대출한 종이책은 반납하고 전자책으로 갈아타서 계속 읽었다.
표지
표지는 하늘과 먼산, 나무, 초원, 호수가 그려진 담백한 느낌의 풍경화이다. 어딘지 모르지만 직접 가 본다면 마음이 편하게 느껴지는 곳일 것 같다. 너무 덥고 습하기 전에 이런 곳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의 원제목을 보니 ‘UNE BREVE ETERNITE:Philosophie de la longevite’이다. 프랑스어 같은데 ETERNITE, Philosophie, longevites는 ‘영원eternity’, ‘철학philosophy’, ‘장수longevity’로 추측된다. 인터넷 번역기를 돌려보니, ‘짧은 영원:장수의 철학’으로 나온다. 한국어판 제목이 훨씬 마음에 와 닿는다.
저자
저자는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 칼럼니스트이다. 도서관 대출한 책에서는 표지 띄지가 없어서 몰랐는데, 전자책의 표지 띄지에서는 저자는 ‘르노드상·메디치상 수상에 빛나는 프랑스 대문호’이다.
이 책은 아마 철학자 또는 신문 칼럼니스트로서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칼럼을 모아서 묶은 책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차례
이 책의 차례는
- 프롤로그-나이가 들었다고 꼭 그 나이인 건 아니다.
- 포기-포기를 포기하라
- 자리-아직은 퇴장할 때가 아니다
- 루틴-시시한 일상이 우리를 구한다
- 시간-당장 죽을 듯이, 영원히 죽지 않을 듯이
- 욕망-아직도 이러고 삽니다
- 사랑-죽는 날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 기회-죄송해요, 늦으셨습니다
- 한계-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 죽음-그럼에도 불구하고
- 영원-불명의 필멸자들
- 에필로그-사랑하고, 찬양하고, 섬기라
순이다. 각 장안에는 4~8개 정도의 칼럼,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감상
저자는 풍부한 철학과 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인용과 비유를 통해서 인생 후반기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프랑스 대문호, 지식인답게 유럽의 근현대 철학자, 사상가, 예술가, 소설가(우선 기억나는 사람만 하이데거, 로맹 가리, 미셀 푸코, 질 들뢰즈, 마르셀 푸르스트, 빅토르 위고) 등의 말을 적절하게 인용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문장 대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하나의 문장마다 바로 바로 공감이 갔다. 오랜만에 이 책은 읽었지만 구입해서 소장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같은 저자의 다른 책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알랭 드 보통) Part 1. (tistory.com)
※ 알랭 드 보통도 그렇고, 왠지 프랑스 철학자 내지는 문필인들이 내 취향과 맞는 글을 잘 쓰는 것 같다. 프랑스 대학 입시(바칼로레아)에서 철학과 사상, 논리적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하던데, 그래서 글 쓰기를 잘 하는 지 궁금하다.
인상 깊었던 문구
반백년 나이를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라서 그런지, 나이듦에 대한 책 속 하나하나의 칼럼이 모두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까지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사했다. 보통은 책 중후반으로 가면 귀찮고 집중력이 떨어져서 필사를 하지 않는데 마음속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이 많아서 끝까지 글로 챙기고 싶었다.
대부분 글이 인상 깊었던 문구은 문구라서 글상자로 접어 두었다.
프롤로그-나이가 들었다고 꼭 그 나이인 건 아니다 中
청춘예찬은 승리하면서도 패배한다. 젊음의 권리를 요구하는 자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매일 조금씩 그 자격을 잃어간다. 그들은 순간의 특권을 영원한 귀족의 자격으로 바꾼다. 한 시대의 파괴자들이 다음 시대에는 구닥다리가 되고 만다.
(중략)
인간이라는 동물은 30세까지 자기는 늙지도 않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느낀다.(P.14)
→ 나도 30대 후반 까지는 늙지도 않고, 기회는 계속 열려 있고, 계속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40세란 숫자를 지나가는 순간,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포기-포기를 포기하라 中
인생이 무거운 권태와 쫓기는 듯한 속도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니 너무 짧아진 동시에 너무 길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생은 죽죽 늘어져 끝나지 않을 것 같다가 꿈처럼 홀연히 사라진다.(P.20)
인생이 짧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中
생이 짧으면 치열하게 살 이유가 생긴다. 그래서 남아 있는 나날 동안 후회되는 부분을 바로잡거나 잘한 부분을 오래 유지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카운트다운의 이점이다. 흐르는 매 순간에 욕심을 내게 된다. 50세를 넘으면 이런저런 욕구가 샘솟아 마음이 급해진다.
(중략)
실존적 미래는 우발적이지 않은, 원하고 욕망했던 내일을 의미한다. 어떤 미래는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만 또 다른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 전자의 미래는 수동적이지만 후자의 미래는 의식적 활동이다. 내일은 춥거나 비가 올 수 있지만 내일 날씨에 상관없이 나는 작정한 대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오래오래 그냥 살아 있기만 할 수도 있지만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하는 의미로 실존할 수 있으려나?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언제나 미래에 기투企投하는 실존자를 구분한다.
빅토르 위고는 좀 더 간단하게, 인간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정말로 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사는 것“이라고 했다.(P.24)
→ 연로하신 부모님, 부모님의 지인을 통해서 느끼는 부분이다. 은퇴 이후 계속 당신들이 (사회적으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시려는 것을 느낀다.
차가운 물벼락 中
오래 사는 것이 절대 규범이 되면서 문명은 노쇠, 기력 상실, 의존을 더욱더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전히 늙어가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참아주지 않는다. 생물학과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생명을 리모델링하겠다는 트랜스휴머니즘의 눈부신 약속들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듣기 좋은 공론, 디지털 언어로 다시 쓴 《파우스트》에 불과하다 그 약속들은 프로메테우스적이긴 하지만 아직 실현이 멀기에 힐책 받을 만하다. 눈부신 미래를 제시하던 공산주의의 배턴을 이어받았으되 과학에 토대를 둔 약속이라고 할까. 그래도 동일한 위안, 자기 자식과 세계에 대한 전지전능의 동일한 꿈이다.(P.32)“
(중략)
45세 이후의 연약한 신체는 자질구레하게 손볼 데가 많다. 고장 났지만 가까스로 수리해서 다음 사고가 날 때까지 몰고 다니는 근사한 구형 세단 같다. 어느 순간 이 병 저 병 전전하며 건강에 대한 환상이 부서지는 때가 온다. 치료는 점점 느려지고 회복은 점점 오래 걸린다. 그래도 이때는 어느 한 가지 중병으로 고생하기보다는 자잘하게 골고루 앓는다.(P.34)
→ 친구들 중에 슬슬 여기저기 아프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선배 중에는 큰 병치례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도전하기를 중
인생의 가을은 언제나 모순적으로 정의되어왔다. 모두가 배려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스러져가는 감미로움과 소박한 삶, 끝없는 겨울잠 속에서 쇠락해가는 슬픔이 있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찬사와 비방, 감탄과 반감이 왔다 갔다 한다. 오래 사는 것이 본인의 미덕 때문이 아니라 의학의 발달 때문인 시대에는 더욱더 그렇다.
(중략)
사실, 행복한 노년의 비결은 오히려 정반대의 태도에 있을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늦게까지 하라. 어떠한 향락이나 호기심도 포기하지 말고 불가능에 도전하라. 생의 마지막 날까지 사랑하고, 일하고, 여행하고, 세상과 타인들에게 마음을 열어두어라. 요컨대, 흔들림 없이 자기 힘을 시험하라.(P.37)
→ 옛날에 비하면 의료 발달에 의해 생명이 연장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연장된 노년이 쇠락하는 겨울로 느껴질 때가 많다. 저자의 말처럼 생의 마지막 날까지 도전하며 스스로를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자리-아직은 퇴장할 때가 아니다
철학하는 나이 中
서양에서는 삶은 딱 한 번이다.
(중략)
동양은 ‘생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고, 서양은 ‘생 안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동양에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은 것이 구원이고, 서양에서는 동일한 시간 동안 여러 번 거듭나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스도교도는 영생을 걸고 단판 게임을 하고 힌두교도는 존재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영혼이 정화될 때 까지 윤회라는 긴 게임을 한다.(P.53)
→ 서양의 삶과 동양의 삶을 잘 비교한 것 같다.
루틴-시시한 일상이 우리를 구한다
시시한 것의 찬란함 中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 클리셰에 빠지기 쉽다. 첫째, 옛날에는 대단한 일이 많았는데 지금은 흥미가 없다. 흔히 하는 말로 “옛날이 좋았지”라는 클리셰다. 둘째, 과거는 불완전한 시작이고 미래에 완성을 이룰 것이라는 클리셰다. 전자는 보수주의자의 생각이고 후자는 진보주의자의 생각이다.
(중략)
나이가 들면 이런 문제가 뒤집힐 수 있다. 다 이루어졌지만 아직 할 일, 다시 할 일이 남았다. 기존의 것을 알아보는 것도 새로운 탐색 못지않게 즐겁다. 동화에서처럼 놀라움보다 재발견이 좋다고 할까, 놀라움조차도 친숙함의 베일을 쓰기를 원한다고 할까.(P.75)
→ 프랑스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들도 생각은 한국과 비슷한 것 같다. 나이가 들면 틀에 박힌 생각도 바꿔서 생각하여 기존의 것을 재발견할 수 있는 통찰, 열린 생각이 필요하다고 동의한다.
반복, 데자뷔의 가면을 쓴 새로움 中
시간은 우리를 끝으로 인도하는 카운트다운인 동시에 지치지 말고 다시 시작하라는 신성한 허락이다. 반복은 불모성과 생산성이라는 양가적 힘을 지녔다. 반복은 고갈 시키는 동시에 변화 시킨다. 반복은 시간의 지속안에서 버티어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 안의 두가지 시간성, 즉 직선적으로 흐르는 시간성과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시간성은 반복을 통하여 조화를 이루고 관성에 빠진 듯 보이면서도 전진하는 느낌을 준다.
(중략)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이지만 다시 꽃을 피울 수 없다는 절망이 더 심각한 환상이다. 생은 판에 박힌 되풀이와 놀라움이라는 이중 구조를 취한다.(P.84)
→ 불모성, 양가적 힘 처음 보는 단어, '반복은 고갈 시키는 동시에 변화시킨다' 이 문장 마음 든다. 두 가지 시간성: 직선적으로 흐르는 시간성,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시간성, 생의 되풀이와 놀라움의 이중 구조, 이런 대구對句 구조 좋다.
황혼은 새벽을 닮아야 한다 中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단단하고 두꺼운 나무 탁자에 갇혀 있던 곤충의 알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찻주전자의 온기에 애벌레로 깨어난 일화를 들려준다. 우리의 재생이 그런 곤충보다 더 신기할 것도 없다. 우리는 끝까지 다듬어지는 상태에 있을 것이요, 불완전한 채로 떠날 것이다.(P.89)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선생님 자주 인용 되시네요. 《월든》을 읽었지만 찻주전자의 온기로 깨어난 애벌레 이야기는 잘 생각이 나지 않음
백조의 노래인가, 아침놀인가 中
모두의 영원한 의문은 이것이다. 흐르는 시간의 파괴성을 창조성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회화나 문학 분야에서는 나이가 들어서야 비범한 솜씨를 보여주는 작가들이 더러 있다.
(중략)
삶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지력이 쇠하지만 예술가들은 여기서 잃은 바를 저기서 얻는다는 법칙 말이다. 그들은 느릿한 젊음을 따라가면서 무덤 앞에 이를 때까지 더욱 강해지고 쾌활해지고 과감해진다.(P.92)
→ 그래 직장인이나 일반인은 은퇴하면 지적 활동이 쇠하지만, 이제까지 직장인으로 공돌이로 주욱 살아오고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예술적 감각을 갖는 사람(예술적 공돌이?)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움직이는 모자이크화 中
우리는 자신을 모른 채 살아간다. 현재라는 안개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늘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해된다. 또렷하지는 않아도 뒤늦게 떠오른 기억의 명암에 비추었을 때만 알 것 같은 의미가 있다.
(중략)
과거의 전율은 결코 현재의 감각에 기생하지 않는다. 어제 먹은 저녁이 아쉬웠다고 오늘의 밥을 맛있게 먹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밥을 먹으러 갈 때는 늘 배가 고프고 뭔가가 먹고 싶은 존재일 뿐, 과거에 무엇을 먹었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예전에 맛있게 먹은 기억은 지금 먹는 음식의 풍미를 돋울 뿐이다. 망각은 인간의 뇌라는 절묘한 지우개 덕분에 얻을 수 있는 희열의 조건이다.(P.113)
→ 과거의 일은 현재에 참고할 수 있는 수 있는 정보이지만, 현재를 대신할 수 없다. 현재에 충실하자.
욕망-아직 이러고 삽니다.
연애하기 좋은 나이 中
우리는 변하지 않건만 우리를 바라보는 남들의 시선이 변한다. “노년의 비극은 아직 젊다는 데 있다”고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같은 감정, 같은 번민, 같은 열망이지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우리의 요구는 이제 금기시된다. 심장은 15세 때나 70세 때나 얌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지만, 70 세에도 그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다. 노인은 젊은이처럼 미끈하고 멋지지 못해 괴롭지만 그 괴로움은 계제에 맞지 않는다.(P.142)
→ 그래 내 심장은 15세나 45세나 70세 때도 얌전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나이가 먹을수록 금지하는 게 많다는 데 동감한다. 누가 뭐래도 나의 길을 가려고 하겠지만 70세의 심장이 버틸 수 있게 知적 · 心적 · 體적 체력을 길러야 겠다.
여기서부터는 종이책은 반납하고, 전자책을 대출해서 읽었음
사랑-죽는 날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백발의 왕관을 쓴 사랑 中
평온하든 열정적이든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의 불완전한 모습을 너그럽게 봐주겠다는 의미다. 신체적인 기대보다는 정신적 기대가 크다. 허영보다는 따뜻한 정과 공감이 더 중요하다.(45%)
→ 맞다. 반려伴侶(함께 하는 이)에게 서로 못 볼 것 많이 보여주며 아웅다웅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다.
잉걸불은 재가 되었다 中
더는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 사람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전화도, 만남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 당하는 일이기에 싫지 않았던 멸시, 상처 주는 말, 잔인한 행동도 이제는 참지 않을 것이다. 상대의 심술, 기만까지 어여삐 봐주었건만 단순히 같이 있고 싶은 마음마저 무시당할 만큼 스스로 낮아지지 않았던가. 세상에서 가장 숭배했던 존재가 이제 당신이 싫어졌다며 떠난다. 당신에게는 그 사람이 전부였는데 그 사람에게 당신은 스쳐 지나가는 한 단계, 임시방편이었을 뿐이다.
(중략)
떠난 사람은 구체화된 불가역성이다. 당신은 순진하게도 운명을 이겨 먹고 조금 더 전율을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다시 당신 발목을 잡았다. 누구나 겪는 일을 어찌 혼자 피해 가겠는가. 이제 극단적인 음란과 극단적인 수줍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어질어질할 일은 없으리라. 목숨도 아깝지 않았던 그 모든 것을 떠나보낸다. 기다림, 미소, 흐느낌, 경련, 흥분, 절망까지도 이제는 안녕이다. 잉걸불은 재가 되었다.(47%)
→ 꼭 노년이 아니라도 짝사랑이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사이에서 헤어지는 과정에서 마음에 대한 묘사가 심금을 울린다. 이 정도로 감정이입이 될 정도로 전달되는 글을 쓰는 저자와 역자의 글쓰기가 부럽다.
죽는 날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中
사랑은 어느 나이에나 우리를 각성시키고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나는 상대를 소중히 여김으로써 그의 창조자가 되고 상대는 상대대로 나의 창조자가 된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는 죽지 않아’라는 뜻이죠”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참 잘 말해주었다. 사랑은 타자의 존재를 기뻐하고 나 또한 살아 있음으로써 상대에게 매일 그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략)
어느 때라도 우리가 읊조리는 불행과 비참을 따뜻하게 들어주는 이는 필요하다. 어느 때라도 우리는 타자를 경청하고 위로와 조언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48%)
→ "내가 반려에게 했던 말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이 되자' 와 같은 말이네요." ^^;
우리가 잡지 않은 기회들 中
사건은 마무리되지 못했을 때만 가슴 아프다. 나이가 들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그렇게 아프다. 마치 이미 잘려나간 팔이나 다리에서 계속 통증을 느끼는 것과도 같다. 그 원동력은 조건법 과거형, 즉 ‘~했더라면’이다. 하지 못한 일을 두고 자기연민에 빠지기만 하면 된다. 일어날 수도 있던 일이 실제 일어난 일보다 중요해진다. 가상이 현실을 갉아먹고 평가절하한다. 우연이라는 간헐적 신이 느닷없이 베푸는 위대한 운명을 소망하는 것이야말로 잃어버린 기회를 그리워하는 심리의 전형이다. 스러져버린 욕망들의 수의가 이미 실현한 야심보다 머릿속을 더 많이 차지한다.(50%)
→ 맞다. 과거 수능시험을 좀 더 잘 쳐서 더 좋은 대학에 입학했더라면, 다른 전공을 선택하여 다른 직업을 가졌더라면 등 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 더 의미를 부여하고, 현실에 대한 불평을 정당화하는 기반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필멸자의 시간 中
우리는 늘 나중에야 깨닫는다. 조짐이 있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안다. 그걸 알았더라면! 예지는 과오를 저지른 후에야 찾아오니 과연 헤겔이 말한 대로 "미네르바의 올빼미(지혜의 상징)는 황혼이 내려앉은 후에야 날아오른다." 그때 위험을 무릅쓰고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그건 아마 우리가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후회는 피할 수 없는 만큼 무익하다. 패배주의가 늘 써먹는 알리바이가 있다. 다시 붙잡기엔 너무 늦었다, 긴 여행을 떠나기엔 너무 늦었다. 다시 사랑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제 와 내가 뭘 해, 겁쟁이는 그렇게 말한다. 20세든 80세든 하면 된다. 담대함이란 돌이킬 수 없는 숙명에지지 않는 것이므로.(52%)
→ '이제 와 내가 뭘 해' 이건 자주 생각하는 말인데 좀 찔린다.
한계-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자유의 세 얼굴 中
인간사의 의미 부재는 자유의 조건이자 인간에게 부여된 저주이기도 하다. 의미가 없으니 우리 안에서, 명암 속에서, 불확실성 속에서 계속 의미를 발견해야만 한다.
(중략)
모든 사람이 자기 뜻대로 살아갈 권한인 자유는 반항, 구속, 고독이라는 세 단계를 거친다. 이 세 단계가 늘 쭉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략)
내가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고 진정으로 내 행위의 주체가 되는 날은 오고야 만다. 그것이 어른이 되는 것, 즉 성장의 불행이자 경이로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도움과 불복종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한다.(61%)
→ ''내가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고 진정으로 내 행위의 주체가 되는 날은 오고야 만다. 그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 문제는 누구도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또한 아무리 가르쳐 줘도 본인 스스로 느끼고 준비하지 않으면 대비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완전히 성공하지는 말라 中
인생은 50세쯤 정상을 찍고 그 다음부터 석양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슬슬 내려오는 걸까? 이 은유도 썩 괜찮아 보이지만 은유는 은유일 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실현하지 못한 모든 것을 우울하게 조사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우울은 우리가 개간해야 할 광대한 땅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아직도 탐험할 만한 곳이 있다.
(중략)
성공한 삶보다는 자기를 실현한 삶이 중요하다. 예측하지 못한 곤란 앞에 마음을 열고, 손익 계산에 얽매이지 않으며, 비록 거의 끝에 다다랐어도 미래의 힘을 믿는 삶 말이다. 성공이라는 개념은 탐색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 같아 불편한 면이 있다. 가장 바랄 만한 상태에 도달했고, 그로써 모험은 끝났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64%)
→ "성공한 삶보다는 자기를 실현한 삶이 중요하다." 학생 때는 성공=자아실현 이라고 배운 것 같은데, 물질적 성공한 삶보다는 정신적 성공이라고 구분해서 생각해 본다.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中
어느 나이에나 이승에서는 새로운 잠재성이 우리를 기다린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에 기대해도 되는 것은 ”현실과의 화해가 아니라 자기 역량과 화해“라고 말한다. ”원하는 것을 원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라. 현실 앞에 납작하니 엎드려 할 수 있는 것만 원해서는 안 된다. 원하는 것을 전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전능 환상이다. 그보다는 자기 역할을 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자기 방식대로 세상에 반응해야 한다. 사랑하고 일하면서.“(66%)
→ "'현실과의 화해가 아니라 자기 역량과 화해'라 프로이트 선생님, 멋진 말 하셨군요(찰 지게 때리시네요)"
죽음의 죽음 中
진짜 기적은 우리에게 지복을 약속하는 온갖 환상적인 종교적 구성물이 아니라 확실한 끝이 있는 인생이다. 종교가 말하는 지복은 우리에게는 끝나지 도 않는 무감각 상태일 뿐이다. 에덴동산의 즐거움도 덧없는 인간의 운명만큼 즐겁지는 못하다. 영원이 있다면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가 영원이다.(71%)
→ 현재에 충실하라는 뜻으로 생각한다.(Carpe Diem)
우리 안의 좀비 中
그 사람 아직도 살아 있어? 난 진작 죽은 줄 알았지! 나폴레옹은 1821년 5월 5일에 죽었지만 그 소식은 거의 두 달이 지나서야 영국과 프랑스에 전해졌다. 반응은 거세지 않았다. 정치가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사건이 아니라 소식일 뿐“이라고 대꾸했다. 경력과 명성을 다한 후에 죽는 것은 비참하다. 그래서 어떤 노배우들은 무대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끝까지 버틴다. 바로 그 각오가 그들을 먹여 살린다. 그 각오가 그들을 초월한다.(75%)
→ 경력과 명성이 다한 후에 죽는 것이 비참하다는 것을 나폴레옹의 죽음의 예로 알려주시고, 그걸 또 죽을 때까지 끝까지 버텨라로 연결시키네
병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中
하지만 이러한 사색에서 벗어나면 질병은 불길하거나 이로운 선택이라기보다 통계적 저주에 가깝다. 누구나 나이가 웬만큼 들면 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부당함은 없다. 그냥 확률일 뿐이다. 질병은 장수가 치르는 대가다. 어떤 병은 더 심각한 병을 방지해 준다. 잔병치레가 많은 사람은 중병을 피할지도 모른다. 늘 골골대는 사람에게 완치란 없고, 그냥 병에 적응해서 사는 거다. 반면, 어떤 병은 진단을 헷갈리게 한다. 속으로 조용히 진행되면서 사람을 갉아먹는 더 심각한 질환을 가려버린다.(78%)
→ 그래, 지금 내가 건강한 게 통계적인 확률의 운이라 생각해야겠군. 잔병치례가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겠군
초라한 위안 中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하여 종교 못지않게 진정 효과가 뛰어난 철학은 다양한 책략을 만들어냈다. 일례로 고대에 ‘위안’이라는 장르는 진정한 걸작을 낳았다. 철학의 위안은 무엇인가? 다가올 역경에 대비하여 그 역경을 가급적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프라이메디타티오praemeditatio, 가능한 모든 곤란과 고통의 원인을 미리 숙고하고 정신 수련에 힘쓰면 실제로 역경이 일어나도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81%)
→ 나이가 들면 철학은 좋아진다는 말이 있던데, 철학은 나이 들면 많아지는 역경에 대비한 정신수련이 될 수 있는 거군
영원은 지금 여기에 中
나의 죽음은 당연히 끔찍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보다는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들은 전부 떠나보내고 나 홀로 이 세상에 남아 있고 싶지는 않다. 나의 죽음은 잔혹한 공식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은 존재론적 재앙이다. 나이가 들면서 사랑하는 이들이 하나둘 사라지면 세상이 쓸쓸해진다. 살아남은 자는 텅 빈 세상에서 시대착오적인 존재일 뿐이다.
(중략)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찰나의 영원뿐이다. 사랑하는 동안, 창조하는 동안 우리는 불멸이다. 생이 언젠가 우리를 떠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다음 세대에게 희열을 넘겨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충분히 생을 사랑해야만 한다.(84%)
→ 죽음은 죽은 자의 몫이 아니고, 남은 자의 몫이라고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자가 과연 행복할지는 미지수다. 우리의 생안에서 사랑해야 하며 행복해야 할 것 같다.
논리적 개소릴 피하는 위로 기술 中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위로에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 형식적인 말이 되어버리거나 논리적인 개소리가 되는 것이다. 로마 철학에는 고결하고도 비장한 위로가 넘쳐난다. 가령,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더 끔찍한 일일 수도 있었는데 그만하기를 다행으로 생각하라는 논리가 그렇다.
(중략)
슬픈 마음은 사회 질서와 다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 질서가 개인적 회환을 차츰 억눌러준다. 죽은 자들에게 권리를 행사하려는 것은 산 자들의 어찌할 수 없는 이기심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주거나 마음껏 슬퍼할 수 있게 내버려 두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돕기에 충분한 때가 얼마나 많은가. 위로라는 분야에서 가장 섬세한 배려는 상대가 스스로 날개를 펼 수 있을 때까지 그냥 곁을 지키면서 넉넉한 애정으로 울타리를 쳐주는 것이다.(85%)
→ 늘, 위로가 어렵다. 위로의 말을 듣는다고 위로가 된다면 그렇게 큰 슬픔이 아닐 것 같다. 위로의 말이 가식처럼 느껴질까 쉽게 나오지 않는다.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슬픔을 겪는 본인이 다시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게 하는 행동(배려)이 중요하다는 것에 동감한다.
에필로그-사랑하고, 찬양하고, 삼가라 中
50세가 넘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어제의 세계로 밀려난 것을 느낀다. 노력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러다 발을 헛디딜까 두렵다. 성장이 나를 긍정하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노화는 비틀거리는 것이다. 꿋꿋이 살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소유자로 만들어주기는커녕 내게서 소유권을 빼앗아간다. 나는 지난 세월을 박탈당했다. 마치 그 나날이 쌓이면 쌓일수록 마이너스가 되어 내 존재를 축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난 세월은 보물처럼 모이지 않고 되레 나의 빚으로 기록된다. 시간은 확신을 앗아갔고 결심에 상처를 냈다.
(중략)
우리는 존재를 긍정하고 무조건 찬동하는 사람으로 끝까지 남아야 한다. 세상의 광휘, 그 눈부심을 찬양하라. 지상에 살아 있음이 기적이다. 비록 위태로운 기적일지라도 기적은 기적이다. 성숙은 끝없는 찬탄의 연습에 드는 것이다.
(중략)
원래부터 우리는 잠시 스치는 존재, 우리를 초월하는 전체의 한 파편이었다. 그동안 잘 버텨왔고 아직도 세상의 호의를 느낄 수 있음에 기뻐하자.(87%)
→ '50세가 넘으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어제의 세계로 밀려난 것을 느낀다.' 동감한다. '비록 위태로운 기적일지라도 기적은 기적이다. 성숙은 끝없는 찬탄의 연습에 드는 것이다.' 현재 주어진 조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쇠락하지 않고 성숙으로 가야겠다고 되뇐다.
책 속에서 새롭게 알게 된 단어
그리고 책 속에서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어려운) 단어도 많이 알게 되었다.
역자(옮긴이)께서 철학과 종교 쪽의 전문 단어를 쓴 경우가 많았다.
모르는 단어를 찾으며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기분도 좋았다.
※ 20개의 단어 중에 2개 정도만 책 속의 옮긴이의 주가 있고 나머지는 따로 뜻이 없어서 인터넷 사전으로 찾은 단어이다.
- 기투企投 :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법칙
-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여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성질과 능력을 개선하려는 지적, 문화적 운동, 장애, 고통, 질병, 노화, 죽음과 같은 인간의 조건들을 바람직하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 규정한다.
- 위경僞經 : 전거가 분명하지 않아 성서에 수록되지 않은 30여 편의 문헌
- 갈마듦 : 서로 번갈아 나타남
- 불모성不毛性 : 아무런 발전이나 결실이 없는 성질
- 양가적兩價的 : 동일한 대상에 대한 상반된 태도가 동시에 존재하는
- 전조轉調 : 악곡의 진행 중 곡조를 다른 조로 바꿈
- 바니타스화vanitas畵 : 죽음의 필연성과 인생의 허무함을 상기 시키는 상징으로 활용하는 회화 장르
- 레버넌트revenant :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 유령
- 무람(없는) : 부끄럽거나 무안하여 삼가고 조심함(하지 않는)
- 전미래前未來 : 직시적 지시점인 미래 전에 발생한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시점, 예) “우리가 도착할 때, 기차는 떠날 것이다.”에서 직시적 지시점은 ‘우리가 도착할’ 미래의 시간이고, ‘기차가 떠나는 것’은 전미래 사건에 해당한다.
- 계제階梯 :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적당한 형편이나 기회, 일이 진행되어 가는 순서 또는 절차
- 잉걸불 : 활짝 피어 이글이글한 숯불, 다 타지 않은 장작불
- 타나토스Thanatos : 자기를 파괴하려는 죽음에의 본능,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을 의인화한 신
- 병자성사病者聖事 : 병을 앓거나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신자가 받는 성사
- 다이몬daimon :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과는 별도로, 산천초목을 지배하고 인간 생활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는 초자연적인 힘에 붙인 이름
- 디크로니피케이션dechronification : 세포를 다시 젊게 되돌림
- 지복至福 : 더할 수 없는 행복
- 대속代贖 : 남의 죄를 대신 받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그 흘린 피로 만민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
- 중보자仲保者 :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
- 니할리즘nihilism : 모든 사상, 진리 따위에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나 주장
- 데카당스decadance : 19세기말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문예 현상, 일반적으로 허무적·퇴폐적인 예술경향이나 생활태도
- 타자성他者性 :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도외시 되는 인간의 성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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