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the road rise up to meet you,

And may the wind be always at your back.

0500_독서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리히 프롬)

겨울밤 2024. 4. 22. 21:07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전자책) 표지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전자책) 표지

제목: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원제:Authentish Leben

지은이:에리히 프롬Erich Fromm

옮긴이:장혜경

출판사:나무생각

 

독서일:2024.418.~2024.4.20.

페이지:

ISBN13:979118668526

소장여부:대출(전자책)

202427번째 독서


독서배경

직전에 도파민네이션을 읽게 된 계기가 어느 인터넷의 삶이 무기력하다 고민글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파민네이션을 다 읽고 나서도 삶의 무기력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도파민네이션》에서는 쾌락-중독-고통의 관계에 대해서 배웠지만, 쾌락과 고통의 저울을 균형되게 하면 무기력이 사라지는지에 대해서는 좀 의아했다. 삶의 무기력에 대한 근원적 인정보를 알고 싶었다. 

2024.04.15 - [0500_독서] - 도파민네이션(애나 렘키)

 

도파민네이션(애나 렘키)

도파민네이션 제목:도파멘네이션 지은이:애나 렘키Anna Lembke 옮긴이:김두완 출판사:흐름출판 독서일:2024.411.~2024.4.17. 페이지: ISBN13:978896596504603180 소장여부:대출(전자책) ※2024년 26번째 독서 독서

winternight.tistory.com

 

 

그러다 전자도서관 도서 리스트에서 이 책을 발견하였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란》 제목부터 딱 맞게 떨어졌다. 그리고 저자도 언제가 들어서 기억 속에 알고 있던 (누군지 몰라도 전혀 처음 듣는 저자 이름이 아닌) ‘에리히 프롬이었다.

 

몇 년 전에 어느 책이었는지, 유투브였는지, 팟캐스트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추천한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났다.

 

당시에 ‘에어비엔비Airbnb’, ‘우버Uber’ 등 공유 서비스의 열풍이 일어, ‘소유할 것인가? 공유할 것인가?’와 같은 트렌드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철학·심리학의 용어와 IT트렌드 용어의  차이가 있겠지만)  소유’, '존재', ‘공유같은 키워드에 관심이 많이 갈 때였다

그 후 소유냐 존재냐도 읽어 보려고는 마음은 있었지만, 새 책을 사서 읽을 용기는 없고, 도서관의 책은 이미 너무 낡아 손 대기 싫었고, 전자책은 epub가 아닌 pdf스캔본이라서 읽기 불편해서 잊고 있었다. (사실 전자책은 앞부분 조금 읽다가 포기하고 덮은 적도 있었다.) 

 

이번에 삶의 무기력에 대한 나름의 정보를 찾기 위해, ‘에리히 프롬의 이 책을 대출하게 되었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전자책) 속표지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전자책) 속표지

표지

전자책 표지는 속표지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순하다. 처음에는 e-ink용 전자책 기기에 최적화하기 위해 일부러 흑백의 표지를 적용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터넷 서점에서 확인하니 종이책 표지도 흑백으로만 구성된 있었다.

 

흰색 배경에 상단 중앙에 제목인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가 세로 쓰기로 쓰여있다. 제목 옆에 핵심 문장으로 에리히 프롬 진짜 삶을 말하다이 쓰여있다..

 

그리고 표지 중앙에는 저자명인 ‘Erich Fromm’이 큼지막하고 비스듬하게 쓰여 있다.

 

하단에는 원형 스티커 디자인처럼 해서 국내 미발표작’, ‘Authentish Leben’과 저자명, 역자명이 들어가 있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전자책) 원제 및 copyright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전자책) 원제 및 copyright

 

원제를 확인하니 'Authentish Leben'이다. 독일어 같고 'leben'은 삶이었나 인생이었나 그랬던 것 같고, 'authentish'는 영어의 'authenticate'처럼 느껴진다. '인증된 삶'인가라고 생각하다가 인터넷 번역기를 돌려보았다.  '진정한 삶'이라고 번역된다.  한국어판 제목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와는 좀 거리감이 느껴진다. (한국 독자들에게 팔릴 만한 제목으로 바꿨을 거라고 추측한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전자책) 원제 'Authentisch Leben'의 뜻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전자책) 원제 'Authentisch Leben'의 뜻

저자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전자책) 저자와 편역자 소개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전자책) 저자와 편역자 소개

저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1900-1980)은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이다. 유태인으로 프랑크프루트에서 태어났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정신과 의사로 정신분석, 심리치료 진료하다 1934년 미국으로 망명해서 컬럼비아 대학에 재직했고, 이후 멕시코 국립대학에서 정신분석학과, 의과 교수로 재직했다. 1974년 스위스로 이직했다.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는 세계적인 베스터셀러가 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B%A6%AC%ED%9E%88_%ED%94%84%EB%A1%AC

 

에리히 프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리히 젤리히만 프롬(독일어: Erich Seligmann Fromm, 1900년 3월 23일 ~ 1980년 3월 18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대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으로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

ko.wikipedia.org

 

편역자인 라이너 풍크Rainer Funk는 저자의 마지막 조교이자 제자로, 에리히 프롬의 저술 활동을 지원한 것 같다. 그리고 저자 사후 저작물의 법적 관리와 유고를 관리한다고 한다. 이 책도 라이너 풍크가 '주도적 삶에 대한 에리히 프롬의 글을 모아 엮은 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전자책) 일러두기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전자책) 일러두기(6/94)

책의 제목인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는  책 속의 일러두기(6/94)에서 말하는 '06_1937 《사회 연구 잡지》에 실린 논문 〈무력감에 대하여〉를 중심으로 나온 제목이 아닐까라고 추측이 된다.

 

차례

  • 서문 – 라이너 풍크
  • 01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 02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 03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 04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 05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 06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 07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
  • 참고문헌
  • 출처

책 속의 발췌


더보기

01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14/94)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만 살지 않는다. 자연에서 거의 뿌리가 뽑힌 존재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문제를 떠안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의미를 삶에 부여할까?

 

내가 아는 한 이것들은 다 한 가지 질문이며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소수에 불과하다.

(중략)

사실 따지고 보면 종교와 철학의 역사는 이런 몇 안되는 대답들의 역사나 시스템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는 대답을 해야 하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우리가 내놓은 대답에 좌우된다.


(15/94) 19세기의 악덕은 무엇이었을까? 첫째가 권위주의, 즉 맹목적 복종의 요구이다. 특히 아이들, 여성, 노동자들에게 권위의 명령에 고민하거나 질문을 제기하지 말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라고 요구하였다. 불복종은 그 자체가 죄였다.

 

두 번째 악덕은 착취, 정확히 말해 야만적인 착취다. 우리는 19세기 직전까지도 상류층의 신사숙년들이 노예무역으로 돈을 벌고 콩고의 흑인들을 거리낌 없이 착취하였으며,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어린아이들을 공장에서 부려먹었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란다.

 

19세기의 세 번째 악덕은 성과 인종차별이다. 모두들 이런 불평등에 확실한 근거가 있고 신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에 신의 말씀과 인간 차별 사이에 존재하는 확연한 모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세기의 네 번째 악덕은 탐욕과 축제다. 중산층에게는 저축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아끼고 절약하여 돈을 모으고 절대 쓰지 않으면 부자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덕목으로 꼽히지 않지만 19세기에는 덕목이었다.

 

19세기의 마지막 악덕은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다. 전형적인 사례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관련한 프로이트의 말이다.


(16/94) 현대의 윤리 문제로서의 권위를 거론하기에 앞서 우선 권위라는 개념에 대해 몇 가지 이론적 설명을 곁들여야겠다. 일단 합리적 권위 비합리적 권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비합리적 권위는 항상 공포와 감정적 복종에 바탕을 둔 압력 행사를 동반한다. 전제 국가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는 맹목적 복종의 권위이다. 이에 반하는 합리적 권위도 있다. 합리적 권위는 능력과 지식에 근거하며 비판을 허용하고, 그 본질상 감소하는 경향이 있으며, 복종과 마조히즘 같은 감정적 요인보다는 직업 능력처럼 한 인간의 능력에 대한 현실적 인정에 바탕을 둔 모든 종류의 권위를 말한다.


(17/94)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뿐 아니라,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야만적인 착취의 대상이던 식민지 주민들과 관련해서도 착취는 끝이 났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물질적 형태의 착취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급격한 감소 추세로 미루어 볼 때 다음 세대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간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19세기에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물론 분명 시간은 절약된다. 하지만 시간을 절약해 놓고는 막상 그 절약한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한다. 기껏해야 시간을 죽이려고 노력할 뿐이다.


(18/94)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프랑스인들은 그것에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가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신경증’이라 부른다.


(19/94) 그런데 오늘날에는 평등을 동일하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같다는 것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동한 권리를 원한다면 타인들과 동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며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강요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진다.

(중략)

인간은 자신을, 자기의 확신,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자기 고유의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인들과 구분되지 않을 때 자신과 일치한다고 느낀다. 타인들과 순응하지 못하면 끔찍한 고독이 닥칠 것이며 집단에서 추방될 위험에 처할 것이라 느낀다.


 (20/94) 우리는 영원한 소비자이다. 우리는 담배, 술, 강연, 책, 영화, 인간을 소비한다. 우리는 아이가 부모에게서 필요로 하는 사랑도 아이에게 필요한 신제품처럼 이야기한다. 우리는 엄청난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수동적 소비자이며, 젖병과 사과를 기다리는 영원한 신생아이다.

 

우리는 소비하고 고대하지만 우리가 생산적이지 않기 때문에 계속 실망한다. 우리는 사물을 생산하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물과의 관계에서조차- 극도로 비생산적이다.


02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23/94)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18세기의 철학자들까지 인간의 본질을 들먹이면서 노예제도를 변호했다. (인간의 평등을 확신한 그리스 스토아학파와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 도마스 모루스, 후안 루이스 비베스 같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예외였다.) 국수주의와 인종주의 역시 ‘인간 본성’을 들먹이면서 탄생했다.


(25/94) 마지막으로 에른스트 카시러와 상징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이 내린 중요한 인간 정의가 있다. 인간은 상징을 창조하는 존재이며, 인간이 창조한 가장 중요한 상징은 언어이다. 말을 이용하여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자기 생각을 교환할 수 있고, 그를 통해 사고 및 노동 과정의 어려움을 현저히 줄인다.


(27/94) 나 자신은 인간의 본질이나 본성이 어느 정도는 –동물의 실존과 달리- 인간의 실존에 내재하는 모순에 처해 있다고 본다. 인간은 동물이지만 동물과 달리 본능이 그의 행동을 주관할 정도는 아니다. 인간은 지능을 넘어 –지능은 동물도 갖고 있다- 자신을 자각하지만 자연의 명령으로부터 달아나지는 못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지만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기에 ‘자연의 변덕’이다. 이런 모순은 갈등과 두려움을, 더 나은 균형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불균형을 불러온다. 하지만 설사 균형을 찾았다 해도 그 균형에 도달하자마자 새로운 모순이 등장하고, 인간은 다시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된다.

 

인간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분열을 해결하는 수단인 이 대답들은 인간 본성을 표현하는 다양한 정의를 낳는다. 분열과 불균형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근절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경제적, 문화적, 심리적 요인에 따라 달라지지만 결코 자의적이거나 수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28/94) 인간은 사물이 아니고 누구에게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한다고 했을 때, 현대 산업사회처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시대는 없다. 이 사회는 이성을 이용해 100년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방식으로 자연 지배를 끝마쳤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기술력을 통해 고무된 인간은 전 에너지를 물건의 생산과 소비에 집중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를 기계를 조작하고 그 기계에 조작당하는 사물로 느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착취당하지 않는 그만큼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인간은 인간 본질을 생계비 벌이에 투자하고, 대부분 인위적으로 조장된 쉼 없이 증가하는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의 힘을 이용한다. 그러느라 자신이 인간임을 망각할 위험에 처한다. 따라서 인간 본질을 바라보는 전통적 시각을 새롭게 고민하기가 지금보다 어려운 때가 없었으며, 지금보다 시급한 때도 없었다.


03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32/94) 자유에 대한 질문과 수단이나 목적에 대해 질문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5세기에 이미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인간을 수단이나 도구로 보는 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구약은 물론 신악과 교부들에게서도 확인되며, 스피노자, 칸트,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키르케고르, 프로이트, 막스 셸러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이어져온 이런 입장은 인간의 자율성이 자유의 기본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철학작들은 자유를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 심리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 비합리적 열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실제 두 개념은 상호보완적이다. 자유롭고 싶은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며, 둘은 –칸트의 말대로- 자기 목적이어야 한다. 수단은 도구이고,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스스로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대상, 사물이 된다.


(33/94) 따라서 자유는 사실이라기보다 가능성이다. 인간의 진짜 인격의 실현인 것이다. 자유는 장애와 조건과 투쟁하여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 마르크스, 스피노자, 베르그송, 칸트, 프로이트, 밀까지도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 자유를 쟁취한다고 했다.

(중략)

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든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퇴보에 빠지지 않고 전진하고 진보하려 노력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독립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34/94) 삶이 의미가 있을까? 철학자, 신학자, 도덕가, 신비주의자, 심리학자들은 거듭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나는 (혹은 누구든) 계속 살아야 할까?” 이런 상황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구원’, 불교도는 ‘해탈’과 ‘깨달음’, 인문주의자들은 ‘사랑과 타인과의 합일’ 혹은 ‘자기 내면의 조화와 온전함’의 의미와 가능성을 물었다.


(36/94) 우리 세기의 중심 문제는 인간의 상호관계이다.

 

하이데거에게는 인간의 ‘세계 안의 존재’도 있지만 ‘함께 있는 존재’도 있다. ‘공동체Gesellschaft’라는 말에도 같은 생각이 담겨 있다. ‘사교성Geselligkeit’은 인간의 본질적 특징이다.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나와 너의 실존과 관련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포이어바흐와 마차도가 가르친 대로 나의 실존에 이미 함께 주어진 너의 실존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사회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존재 역시 우리 각 개인의 일부이기에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다인간은 본성상 타인을 위한 존재이다.


(37/94) 모든 이론이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사상을 담고 있다. 인간은 본질상 초월의 욕망을 품은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 자신이 되려는 욕망을 품는 존재이다.

 

궁극적으로 인간 공동의 본성을 포함하는 소통의 문제는 우리 세기에 들어와 점점 더 시급한 현안이 되었다. 기술적 소통의 가능성은 지나치리만큼 과도하게 증가하였지만 대중을 지향하는 대중매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의 실제적 소통은 날로 힘들어졌다. (여기서 ‘대중mass’이라는 말은 국민 다수가 아니다. 대중은 –오르테가가 말했든- 물화된 인간, 대상, 도구, 수단으로서의 인간이다.)


(38/94) 요약하자면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헌신이 곧 자신의 사적 공간을 포기한다거나 타인의 사적 공간을 침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랑은 인식이지만, 또 인식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에게 투명하다면 타인의 불투명성은 인간의 가능성 안에서 투명해질 것이다.


04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41/94) 우리는 자아실현이 사고 행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인격의 실현을 통해, 모든 감정적 가능성과 지적 가능성이 활발하게 표현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가능성은 모두에게 깃들어 있지만 겉으로 표현하는 만큼만 실현된다. 적극적 자유는 통합된 전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심리학의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에 도달한다. 바로 자발성의 문제이다. 자발적 활동이란 고립이나 무기력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강제적 활동이 아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행동 모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동인형 같은 순응주의자의 활동도 아니다. 자발적 활동sponstaneous activity이란 라틴어 어원 sponte의 뜻 그대로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을 말한다. 라틴어 sponte는 ‘자유의지로’라는 뜻이다.

 

활동은 ‘어떤 것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활동이란 감정의 영역은 물론이고 지적, 감각적, 의지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지는 인간의 창의적 활동을 말한다. 자발성의 전제 조건은 인격을 전체로 받아들이고 ‘이성’과 ‘본성’으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자아의 본질적 부분들을 억압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에게 명료해질 때, 삶의 다양한 영역을 근본적으로 통합시켰을 때에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략)

자발적 활동은 자아의 온전함을 희생하지 않고도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자아의 자발적 실현을 통해 인간은 새롭게 세상 –인간, 자연,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발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사랑이다. 하지만 자아가 다른 사람 속으로 놁아버리는 그런 사랑이나 다른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랑은 아니다. 그 사랑은 개인의 자아를 보존하며,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그런 사랑이다. 사랑의 역동적 성격은 분리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개성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에서 탄생하는 양극성에 있다.

 

자발성의 다른 요인은 노동이다. 여기에서의 노동은 고독에서 도피할 목적의 강제적 활동이 아니며, 한편으로는 자연을 지배하려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만든 생산물을 우상화하거나 이 생산물의 노예가 되는 활동도 아니다. 인간이 창조의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노동이다.

 

사랑과 노동에 해당되는 사항은 감각적 기쁨이나 공동체 정치 활동에의 참여 같은 모든 자발적인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는 자아의 개성을 긍정함과 동시에 자아를 타인과 자연과 하나로 만든다. 자유에 내재하는 근본적 분열 –개성의 탄생과 고독의 고통-이 인간의 자발적 활동을 통해 더 높은 차원에서 해소되는 것이다.

→ 사랑과 의미 있는 활동(노동)의 중요성을 말하는 부분은 '빅터 플랭클Victor Frankl'의 '로고테라피' 부분을 적용하는 맥락처럼 느껴진다.

2024.01.24 - [0500_독서]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제목:빅터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원제:Man’s search for meaning 저자:빅터 프랭클Viktor Emile Frankl 역자:이시형 출판사:청아출판사 독서일:2024.1.21.~2024.1.23. 페이

winternight.tistory.com


(43/94) 중요한 것은 활동 그 자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서는 무게 중심이 정확히 거꾸로 되어 있다. 우리는 구체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생산하는 대신 상품을 팔겠다는 추상적 목적을 위해 생산한다. 모든 유형, 무형의 사물을 돈을 주고 살 수 있고, 돈만 주면 다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여긴다. 우리 개인의 특성과 노력의 성공 또한 돈과 명성, 권력을 위해서 팔 수 있는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무게 중심이 창의적 활동이 주는 순간적 만족에서 완제품의 가치로 옮겨간다.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만족 –활동의 순간 체험하는 것-을 잃고서 잡았다고 믿는 순간 실망을 안겨주는 환영과 성공이라는 이름의 가짜 행복의 뒤를 쫓아다닌다.

→ 행복은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성공과 곧 꺼져버리는 실망의 가짜 행복 )가 아니라, 활동하는 순간 만족으로 진짜 행복이란 뜻으로 해석해야겠지...


 

(46/94)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창의적 사고는 –다른 창의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감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감정 없이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이 이상적인 태도가 되어버렸다. ‘감정적’이라는 말은 불균형과 같은 뜻이 되었고, 심지어 정신 장애의 뜻으로 해석된다.


 

(47/94) 우리의 느낌과 감정 못지 않게 독창적 사고 역시 왜곡된다. 처음

부터 우리의 교육은 아이의 독자적 사고를 막고 아이의 머리에 완성된 생각을 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방법이 어린아이에게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주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아이는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가득한 손으로 이성으로 세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아이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이 낯설고 거대한 세상에서 방향을 잡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대놓고 경멸을 하건(어린아이, 노인, 병자처럼) 힘없는 모든 이들에게 하듯 교묘하게 무시를 하건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취급만으로도 이미 독자적 사고의 용기는 상당히 꺾이고 만다. 그보다 더 심한 문제도 있다. 보통의 성인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전형적인 태도, 즉 거짓 –고의가 아닌 경우라고 해도- 이 바로 그것이다.

(중략)

“아이는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이에 대해 알려고 들 때 아이에게 돌아오는 것은 짜증이 섞였거나 우아한 거부뿐이다.


(49/94) 이 모든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가 듣는 것과 더 이상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감정과 비판적 판단력의 훼손에 흥분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점점 더 무관심해진다. 삶은 ‘자유’의 이름으로 일체의 질서를 상실한다. 삶은 수많은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전체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다.


(50/94)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가지고 싶은 것을 갖는 데 쏟는다. 그런 행동의 전제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묻지 않는다. 전제 조건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정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를 고민할 시간을 내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 때는 좋은 성적을 받고 싶고, 어른이 되어서는 성공의 사다리에 더 높이 오르고 싶고, 돈을 벌고 명성을 얻고 싶고, 더 좋은 차를 사고 여행을 하고 싶다.

 

하지만 한 번씩 이런 악착같은 노력이 멈출 때면 의문이 밀려들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자리에 오르면, 더 좋은 차를 사면, 이 여행을 할 수 있으면 그다음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행복해질 것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이루고 나면 허망해질 목표를 좇아 달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질문이 한 인간의 모든 활동, 즉 그가 원하는 것의 관념을 떠받치는 기틀에 의혹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불안을 조장하는 생각을 최대한 빨리 떨쳐버리려 노력한다. 그런 의문으로 괴로운 것은 그저 피곤하거나 기분이 울적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원래 자기 것이라 여기는 목표를 계속해서 좇아간다.

 

이 모두는 진리의 관념이 모호하다는 증거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원하는 게 마땅한 것만 원한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이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가장 까다로운 문제 중 하나이다. 완제품으로 제공된 목표를 우리의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악착같이 회피하려는 바로 그 과제인 것이다.

 

현대인은 모두가 ‘자신의’ 목표라고 우기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엄청난 모험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위험과 책임을 감수하고 자기 자신의 목표를 정하는 데에는 심각한 공포를 느낀다. 혼신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증거라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중략)

 

우리의 소망 –우리의 생각과 느낌 역시- 어느 정도까지 진짜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것인지를 깨닫기가 이렇게나 힘든 것은 권위와 자유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의 역사를 거치면서 교회의 권위는 국가의 권위에 자리를 내주었고 국가의 권위는 양심의 권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는 양심의 권위가 건강한 인간 이성과 여론이라는 익명의 권위로 대체되었고, 결과적으로 순응에 도달하였다. 공개적 형태의 낡은 권위를 벗어던진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종류의 권위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순응주의자가 되었지만 스스로가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이런 착각은 개인이 자신의 불안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도와주기는 하지만, 줄 수 있는 도움은 거기까지다. 근본적으로 자아가 너무 허약해졌기 때문에 인간은 무력한 느낌,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린다. 더 이상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모든 것이 도구화된 세상에 살다 보니 인간도 자기 손으로 만든 기계의 일부처럼 되어버렸다. 인간은 타인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며, 그러느라 자유로운 인간의 진짜 확신의 근거가 될 자아를 상실했다.

→ 이 부분은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 대한 좋은 힌트가 될 것 같다.


(51/94)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고,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이런 회의를 침묵시키고 어느 정도의 확신을 얻는다. 하지만 그 대가는 크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면 삶은 좌절한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직 살아 있지만 그의 감정이나 영혼은 이미 죽었다. 계속 움직이긴 하지만 생명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만족과 낙관론의 무대 뒤편에서 오늘날의 인간은 죽도록 불행하다. 실제로 그는 절망의 끝에 서있다. 절망의 심정으로 개성이란 것을 붙들고 늘어진다. ‘다르고’ 싶고 어떤 것을 ‘다르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칭찬을 알지 못한다.


05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54/94) 현대인의 행동 동기인 ‘자아’는 사회적 자아다. 타인이 그에게 기대하는 바에 따라 연기를 하는, 그가 맡은 객관적 기능의 주관적 위장과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자아다. 현대의 이기심은 사회적 자아를 대상으로 삼는 탐욕이며, 이는 진정한 자아의 좌절에 그 원인이 있다. 실제 현대인의 자아는 너무 허약해져서 전체 자아의 조각이 되었다. 다시 말해 –전 인격의 다른 모든 요인은 배제한 채- 지성과 의지력으로만 남은 것이다.

 

(중략)

 

현대인이 느끼는 고립과 무기력의 감정은 인간관계를 통해 더 강화된다. 인간은 서로 조종하고 서로를 목적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며 서로에게 무관심하다모든 개인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에서 시장 법칙이 통한다. 경제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서로 싸우고 필요한 경우 서로를 경제적으로 파멸시키는 짓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66/94) 인간의 자긍심은 그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가 이윤을 남기고 자신을 판매할 수 있느냐, 경력의 출발 시점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 한마디로 그가 ‘성공했느냐’에 달려 있다. 그의 몸과 정신과 영혼은 그의 자산이며 그의 삶의 과제는 이것을 유익하게 투자하여 이익을 거두는 것이다. 친절과 예의, 관용 같은 인간적 특성들은 상품이 되며, 인력시장에서 더 높은 가격을 받게 해주는 ‘인성 꾸러미’의 차변 항목이 된다. 스스로를 투자하여 이윤을 내지 못한 사람은 패자라는 느낌을 갖는다. 성공을 거두면 그것은 그의 성공이다. 물론 그의 가치는 항상 그 자신의 외부 요인들, 그의 가치를 상품의 가치처럼 결정하는 변덕스러운 시장의 판단에 좌우된다. 시장에서 이윤을 내며 팔리자 못한 모든 상품이 그러하듯 그 역시 제아무리 사용가치가 대단하다 해도 –그의 교환가치와 관련하여서는- 무가치하다.

 

(중략)

 

현대인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외부의 족쇄를 벗어던졌다. 자신이 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지만 알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자유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익명의 권위에 의지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자아를 받아 들인다. 또 그럴수록 더 무력감을 느끼고 순응을 강요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모든 낙관주의와 피상적인 진취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사회적 성공만이 인간의 자긍심을 높이는데, 이를 위해 자기가 원하는 진정한 자유와 자아가 아닌, 사회적 전문가나 권위에 따라 사회적 자아를 따라 행동하다 무력감에 빠진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06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69/94) 극단적 무력감은 대부분 신경증적 인성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동일한 감정의 낌새는 우리 시대의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73/94) 감정의 괴로움을 극복하려는 일차적 시도는 무력감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련의 합리화이다. 근거로 제공되는 합리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로는 다음의 그것들을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이 무기력한 이유가 신체적 결함을 갖고 있고 ‘아프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심리적 이유에서 나온 무력감을 자신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고 원칙적으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신체적 결함 탓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다른 형태의 합리화는 특정한 인생 경험으로 인생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기에 모든 활력과 용기를 빼앗겼다는 확신이다. 어린 시절의 특정한 경험, 불행한 사랑, 경제적 파탄, 친구에 대한 실망을 무력감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정신분석 이론을 단순화시키는 탓에 이런 합리화가 많은 관점에서 더욱 수월해졌다.


(74/94) 시간에 대한 믿음에서는 ‘갑작스러운 변화(변화의 돌연성)’라는 요소가 부재한다. 그 대신 ‘시간이 가면서’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느끼는 갈등에 대해서도 직접 결단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절로 해결될 것이라 기대한다. 특히 자신의 능력과 관련하여 이런 시간에 대한 믿음이 자주 발견된다. 이루고 싶었던 일을 전혀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 그럴 준비조차 못했다는 사실을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말로 위로한다.

 

(중략)

 

많은 경우 일정한 연령 –평균적으로 40대 초반-에 도달하면 각성하여 상상을 포기하고 자력을 활용하려 노력하거나, 아니면 위안을 주는 시간의 착각 없이는 견딜 수 없기에 신경증으로 무너진다.


 

(80/94) 현대 사회는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 능력에 바탕을 두고 평가한다. 어떤 사람에게 돌아가는 존중의 정도는 그의 경제적 생산력의 정도에 좌우된다. 경제적으로 어떤 잠재력도 없는 사람은 결국 인간적 주목을 받지 못한다. 노인을 대하는 태도, 병원에서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세심하게 관찰해 보면 아이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똑같은 태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냉혹한 무시부터 과도한 친절과 도움에 이르는 모든 감정의 수위가 바로 그것이다.

 

(중략)

 

아이의 무력감이 탄생하는 조건은 더 높은 차원인 어른의 삶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다만 어른의 경우,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무시하는 상황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어른은 그가 진정으로 바라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며 성공도 실패도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라는 말을 듣는다. 삶은 우연이 아닌 자신의 재능, 자신의 근면, 자신의 에너지가 일차적으로 결정하는 거대한 게임이라고 말이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실제 상황과 첨예하게 대립된다. 우리 사회의 성인들은 사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자신이 약한 것이 다 자기의 책임이라고 믿게 될수록 무기력이 더욱 심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그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전혀 없다. 그가 어떤 능력을 갖출 수 있는 지를 출생의 우연이 결정한다. 일자리를 구할 수 수는 있을지, 어떤 작업을 선택할 수 있을지도 본질적으로 그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는 요인들이 결정한다. 심지어 파트너를 선택하는 자유조차 경제적, 사회적 경계의 제약을 받는다. 기분, 의견, 취향은 주입된 것이며, 어, 어떤 일탈을 저지르면 더 심한 고립으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 세상이 활짝 열려 있다는 착각을 하며 시작한 사람들 중에서 어느 정도 독립적 경제적 안정을 이룬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극소수인지는 통계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07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

 

(86/94) 우리는 투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이미지를 왜곡하기도 한다. 우리 자신의 감정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특성은 불교 교리에서 말하는 탐(탐욕), 진(성냄), 치(어리석음)에 해당하는 3독이다. 탐욕을 갖고 상대에게 무언가를 원할 때 상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탐욕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분노가 강요하는 대로, 우리의 어리석음이 상상하는 대로 상대를 왜곡한다.


(87/94) 이렇게 보고 응답하고 인식하고 인식 대상을 알아보는 감각을 갖추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진짜 삶의) 첫 번째 조건은 감탄의 능력이다. 아이들은 이 능력을 아직 갖고 있다. 노력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방향을 찾고 향상 새로운 사물을 붙잡아 알아간다. 당황하고 놀라고 감탄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중략)

 

(진짜 삶의)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서구 문화에서는 희귀한 것이다. 우리는 늘 분주하지만 집중하지 못한다.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다음 것을, 지금 하는 일을 끝마칠 수 있는 그 순간을 생각한다. 최대한 많은 일을 동시에 한다.

(중략)

이 모든 일에 집중해서 한다면 나에게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 경험으로서의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만 존재한다.

→ 이제까지 읽었던 대부분의 심리학 책에서 나오는 말 '현재에 충실하라.'


(88/94) 하지만 자신의 자기와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감정, 즉 정체감이 필요하다. 이 ‘자이’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미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정체감은 우리가 사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 개인이 아직 개체가 아닌 원시 사회의 ‘자기’감정은 ‘나는 우리’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정체감은 내가 나를 집단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이 진척되고 스스로를 개체로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정체감이 집단과 분리된다. 독자적 개체인 그는 이제 스스로를 ‘나’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그럴 때 나의 자아는 사물로서의, 소유물로서의 나의 인격에 집착하는 ‘자아’이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포로이다. 강금당했기에 어쩔 수 없이 불행하고 공포에 사로잡힌 포로다. 진정한 자아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을 부수어야 한다. 사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 된다. 창조적 응답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을 경험하도록 배워야 한다.

→ 이 부분은 아들러의 자신을 바꾸는 용기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2023.10.26 - [0500_독서] - ALFRED ADLER(알프레드 아들러)

 

ALFRED ADLER(알프레드 아들러)

알프레드 아들러 제목:알프레드 아들러 부제:건강한 인간의 긍정적 노래와 도전을 위한 용기 저자: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번역:김문성 출판사:스타북스 독서일:2023.10.11.~2023.10.19. 페이지:296

winternight.tistory.com


(89/94) 원래 평등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위인이며 결코 타인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동등하다는 의미다. 종교적으로 번역한다면 만인은 신의 자녀이며 다른 인간을 자신의 신이나 주인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평등이란 우리 모두가 온갖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간적 존엄성을 가진다는 의미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차이를 개발할 권리가 있지만, 그 차이를 타인을 착취하는 데 이용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평등은 무리와 달라서는 안 되다는 의미의 동일성이다. 차이가 평등의 원칙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공포가 지배하는 것이다.


(90/94) --마지막 문단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중략)

 

인간은 인간 고유의 이분二分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은 안전을 의미하는 과거 상태의 포기를 두려워하지만 자신의 힘을 더 자유롭게, 더 완전히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소망 사이를 항상 이리저리 오간다.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태어날 준비 –모든 안전과 착각을 포기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성경에 나온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말하는 용기, 즉 자신의 나라와 가족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갈 용기다. 자신의 사고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관련하여서도 진리 말고는 그 무엇도 추구하지 않겠다는 이런 용기는 믿음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하다. 여기서의 믿음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믿음, 즉 과학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이념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구약에서 믿음을 칭하는 단어 ‘에무나emuna’가 확신을 뜻하는 것과 같은 믿음이다. 사고와 감정에서 자기 경험의 현실성을 확신하고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 이 부분은 아들러 이론을 적용한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가 생각난다.

2024.03.24 - [0500_독서] -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지은이: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옮긴이:전경아 감수자:김정운 출판사:인플루엔셜 독서일:2024.3.21.~2024.3. 페이지: ISBN13:9791168340831 소장여부:대

winternight.tistory.com

 


최종 감상

이 책에서도 도파민네이션처럼 무기력에 대한 답을 찾았다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하지만 이전에 읽었던 심리학 관련 책의 내용이 연결되는 부분을 많이 발견하여 나름 재미가 있었다.  책 속에서 프로이트는 직접적으로 많이 언급되고,  아들러, 빅터 플랭클의 심리학의 내용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집단 사회에 맞게 획일화된 자아로 인해, 자신만의 독창성을 잃어버려서 무기력하다로 생각하려고 하니, 좀 너무 광범위한 말로 퉁치는 것 같아서 별로 인 것 같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 하는가?’에 대해서 좀 더 족집게 같은 원인을 말해주기를 바래서 그런 것 같다.

 

무기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매일 새롭게 살고 용기를 갖고 현재를 극복하는 믿음을 통해서 실천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뭔가 알프레드 아들러의 자신을 바꾸기 위한 용기가 연상되었다.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자아가 아닌 스스로 독창적인 자아를 창조하고 현재에 집중해 가다 보면,, 반복되는 삶의 무기력을 이길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책 속에서는 판사, 의사, 직장인 등과 같은 (지식)노동자가 아닌, 예술가는 비교적 독창적인 자아를 잘 만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에서도 대부분이 후퇴하는 인생의 노후에도 예술적 분야에서는 더 밝은 광휘를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2024.01.30 - [0500_독서] -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파스칼 브뤼크네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파스칼 브뤼크네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제목: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원제:UNE BREVE ETERNITE:Philosophie de la longevite 저자:파스칼 브뤼크네르Pascal Bruckner 역자:이세진 출판사:인플루엔셜 독서일:2024.1.27.~2

winternight.tistory.com

 

모든 사람이 예술가는 될 수 없겠지만, 예술을 지향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무기력을 줄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예술은 좀 외롭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예술가는 대부분 생전에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사후에 가치를 얻는 경우가 일부 있는 괴로운 삶인데, 과연 무기력과 괴로움을 교환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든다.

 

마지막으로, 다시 삶의 무기력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만한 책을 찾아서 (시간이 될 때)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책 속에서 알게 된 단어

  1. 사이코그램psychogram: 성격 이론 및 지각, 그래프, 필적 분석과 같은 심리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어
  2. 조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 (그리스어)정치적 동물political animal
  3. 에무나emuna:(히브리어)믿음,신앙, 의지, 성실

 

※ 그리고, 뜬금없지 않지만, 신해철의 노래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가 갑자기 생각났다. 

더보기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 신해철

 

[가사]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그냥 되는 대로 사니
사사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그냥 되는 대로 사니
사사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그냥 되는 대로 사니
사사사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게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게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머야 머야 머야 머야?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게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게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 ?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그 나이를 그 나이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그 나이를 그 나이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그걸 하나 하나 몰라!
그 나이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퍼 먹도록
그걸 하나 그걸 하나 몰라!

이거 아니면 죽음, 정말
이거 아니면 끝장, 진짜
내 전부를 걸어 보고 싶은 그런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게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머야 머야 머야 머야?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그냥 되는 대로 사니
사사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그냥 되는 대로 사니
사사사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그냥 되는 대로 사니
사사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게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게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게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 ?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게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 ?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그 나이를 그 나이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그 나이를 그 나이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그걸 하나 하나 몰라!
그 나이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퍼 먹도록
그걸 하나 그걸 하나 몰라!

이거 아니면 죽음, 정말
이거 아니면 끝장, 진짜
내 전부를 걸어 보고 싶은 그런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이거 아니면 죽음, 정말
이거 아니면 끝장, 진짜
내 전부를 걸어 보고 싶은 그런
이거 아니면 죽음, 정말
이거 아니면 끝장, 진짜
내 전부를 걸어 보고 싶은 그런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이거 아니면 죽음, 정말
이거 아니면 끝장, 진짜
내 전부를 걸어 보고 싶은 그런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머야 머야 머야 머야 머야 머야 머야 머야 머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