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the road rise up to meet you,

And may the wind be always at your back.

0920_小幸時

위로, 그 마음 전달의 어려움

겨울밤 2024. 10. 13. 14:24

 

 


가장 심한 착각은 삶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늦은 가을, 늦은 오후, 어느 공원에서
늦은 가을, 늦은 오후, 어느 공원에서

 

소식,  무소식이 희소식 

좋은 가을 날씨가 계속되고 있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마냥 좋은 일만 있지는 않다.

 

‘누구는 회사에서 퇴직하고 아내와도 안 좋다 하더라. 한창인 애들이 둘이나 있는데...’,

 

‘예전에 길 건너의 파란 대문 집 00이는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데, 갑자기 쓰러져서...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오랜만에 근황을 듣다가 뜻밖의 소식이 가슴 속을 무겁게 파고든다.

 

추억,  나만의 희미한 

40년에서 30년 전의 어릴 적 동네와 초등학교 때의 동기와 이웃 형의 이야기지만 동년배라는 생각 때문인지 마음이 더 갔다.

 

사실 과거 그 시절에 아주 친하고 살갑고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는 사이 정도로 당시에도 길에서 만나면 인사하고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우리 학교 애네, 우리 동네 형이네’ 이렇게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지나가는 게 다였다.

성인 되어서도 만난 적도 없었다. 그냥 길을 가다 마주쳐도 서로 모를 사이라고 해도 틀린 말을 아닐 것이다. 스

 

슬픈 소식,  관계에서 오는 

하지만 모르는 사람의 안 좋은 소식은 뉴스(일어난 사건)로 쉽게 잊어버릴  수 있지만,

기억 속에서라도 알고 있는 사람의 안 좋은 소식은 비보(悲報, 슬픈 소식)가 되어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내 기억 속 어릴 때의 그들의 모습은 나와 다를 것 없었는데, 지금은 다른 상황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상상,  차이를 알 수 없는 

먼저, 나도 똑같이 그런 상황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내 기억 속에 그들과 나의 모습이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삶의 과정은 겪는 사람은 없고 그에 따른 현재의 삶도 같을 수 없다.

누구는 잘 살았고 누구는 잘못 살았다는 것도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내 기억 속의 그때의 모습과 소식을 전해 듣고 머릿속에 현재의 상상만 있을 뿐이다.

 

안도,  본능적인

그다음, 그런 상황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이 든다.

남의 불행을 비교해서 자신을 상황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기억 속의 우리의 모습은 다르지 않았으니 현재의 모습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잊고 지냈는데,

사실은 현재의 모습은 다른다는 것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두려운 상황이 나의 이야기가 아닌 것에 안도하고 있는 것이다.

 

표현,  표현하기 어려운

이제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마음속 관계자로서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당사자를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내 기억 속의 일원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인간적인 모습일 거라 생각한다.

 

내 마음은 분명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힘겨운 상황에 대해서 저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정도로 풀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다음이 걱정된다. ‘그렇게 마음 써 주시니, 위로가 되고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는 힘이 됩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진짜 힘든 상황에서 그런 말이 쉽게 나올까라는 의문이 든다.

 

‘한마디 말이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도 있지만, 위로 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지는 상상이 잘되지 않는다.

힘든 시기에 아무도 옆에 없다고 느꼈을 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힘이 된다라고 자주 들었지만 잘 모르겠다.

 

말,  입으로 내기 쉽지만 마음을 전달하기 어려운   

그냥, 말만으로 위로가 잘 전달되지 않으니, 진심을 다해서 말하면 분명 뜻이 닿을 거라고도 말하지만,

이런 슬픔에 대해 건네는 말을 빈말로 하지는 않는다. 이런 말을 앞에서 할 때면 내 마음도 먹먹해진다.

 

상대방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면 '측은지심'에 대한 말뿐만 아니라 행동도 함께 하겠지만,

제3자의 상황에서는 함부로 행동하는 것도 쉽지 않다.  

주관적인 위로의 행동이 당사자에게 위로가 되는 것인지, 부담이 되는 것인지 쉽게 구분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큰 슬픔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나의 위로말에 대한 피드백을 가지고 걱정을 할 상황도 아니다.

그냥 묵묵히 진심이 전해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위로,  상대와 나를 위한   

그 상황에서 제3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상대방을 믿고 돕겠다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당사자가 도움을 달라고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도우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먼저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는 것도 당사자는 쉽지 않다. 

 

결국 슬픔은 스스로가 딛고 일어서는 것 말고는 남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누군가 그랬던가, '표현하지 않는 마음은 알 수 없다.' 고   

힘들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면책을 위해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은 아니다. 

그 상황에서 최소한의 할 수 있는 도리를 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지금 당신의 힘든 상황을 이해하고,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저도) 안타깝고 슬픕니다.

변변치 않지만 당신의 편에서 함께 할께요.' 

 

결국, 위로의 말은 자신을 위한 말이기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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