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the road rise up to meet you,

And may the wind be always at your back.

0500_독서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겨울밤 2024. 3. 24. 15:11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전자책) 표지
《미움받을 용기》(전자책) 표지

지은이: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옮긴이:전경아

감수자:김정운

 

출판사:인플루엔셜

 

독서일:2024.3.21.~2024.3.

페이지:

ISBN13:9791168340831

소장여부:대출(전자책)

※ 2024년 19번째 독서


2022.09.02 - [0500_독서] - 마흔에게(기시미 이치로)

 

마흔에게(기시미 이치로)

마흔에게(기시미 이치로) 제목:마흔에게 저자:기시미 이치로 역자:전경아 출판사:다산초당 독서일:2018.12.12.~2022.09.02. 소장여부:소장 페이지:255 《마흔에게》는 아마 내가 마흔 살 생일을 지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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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배경

미움받을 용기는 한 5~7년 전쯤에 들어봤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2022년도에 동일한 저자의 마흔에게도 읽었다.  사실 마흔에게는 나에게 큰 반향을 주지 못했다. 책 속에 내용에 반하여 스스로가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  마흔에게책 출판 당시에는 미움받을 용기150만 독자를 사로잡았다‘고 나오는데, 이 책을 보니, 20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이다. 미움받을 용기가 꾸준히 잘 팔리는 것 같아 읽어 보기로 했다.

 

 2023.10.26 - [0500_독서] - ALFRED ADLER(알프레드 아들러)

 

ALFRED ADLER(알프레드 아들러)

알프레드 아들러 제목:알프레드 아들러 부제:건강한 인간의 긍정적 노래와 도전을 위한 용기 저자: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번역:김문성 출판사:스타북스 독서일:2023.10.11.~2023.10.19. 페이지: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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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7 - [0500_독서] -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심리학x철학 강의(시미다 마사야)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심리학x철학 강의(시미다 마사야)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심리학×철학 강의 제목: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심리학×철학 강의 저자:시마다 마사야 역자:이정은 출판사:홍익출판사 독서일:2023.11.17.~2023.11.23. 페이지:208 ISBN13:978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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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하반기에 읽었던 아들러 관련 책들도 생각이 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작년에 읽고 블로그에 남겼던 글을 다시 봐도 '아들러=열등감', '아들러=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극복할 용기' 2개의 키워드 정도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움받을 용기》(전자책) 속표지
《미움받을 용기》(전자책) 속표지

 

표지

표지는 옅은 진홍색에서 옅은 녹색으로 색채가 변화하는 그라데이션 배경 세로 쓰기로 제목과 저자, 역자, 감수자 정보가 쓰여있다.

 

표지 핵심 문장은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이다. 철학과 심리학에 가방끈 짧은 내가 책을 읽고 나서 느끼는 건, '아들러의 가르침'인지,  핵심 저자인 '아들러의 향기를 가미한 기시미 이치로 식 가르침' 인지 잘 모르겠다.

 

표지 띄지의 핵심 문장은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용기의 문제다.”이다.  아들러가 주장했던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극복할 용기' 를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용기 문제다 ' 좀 더 구체화해서 강조하고 있다. 

 

《미움받을 용기》(전자책) 알프레드 아들러와 저자 소개
《미움받을 용기》(전자책) 알프레드 아들러와 저자 소개

저자

저자 소개 페이지에서 저자보다 앞서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를 소개하고 있다. 책의 사상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용기의 심리학을 수립한 심리학자로 내세우고 있다.

(2/140) 아들러에 의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생에 놓인 문제를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즉 자유도 행복도 모두 ‘용기’의 문제이지 환경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들러 심리학을 ‘용기의 심리학’이라고도 부른다.

 

실제 책의 저자는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이다. 기시미 이치로는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한 철학자겸 심리학자로 소개, 고가 후미타케는 프리랜서 작가로 기시미 이치로와 문답을 통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소개되어 있다

 

책의 내용은 아들러 심리학을 설명하는 '철학자'와 그를 찾아와 토론하는 '청년'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책 속의 '철학자'가  기시미 이치로 저자이고,  '청년'이 고미 후미타케 저자일 거라는 추측이 든다.

차례

시작하며

  1. 첫 번째 밤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2. 두 번째 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3. 세 번째 밤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4. 네 번째 밤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5. 다섭 번째 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각 밤() 안에는 9~12개의 토픽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 토픽은 끊기지 않고,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로 이어져 나간다.  

감상

책 속의 흐름으로 하나의 밤 동안 '청년'이 물어보면 '철학자'가 대답하는 방식으로, 각 밤의 주제 문장으로 결론 또는 '철학자'의 가르침에 '청년'이 의심, 부정, 분노, 수용, 변화의 과정을 거쳐 마지막 페이지에서 아들러 심리학을 받아들여, 새로운 자신으로 시작하겠다는 다짐으로 '철학자'의 집을 떠난다. 

 

책 속의 '청년'은 내 모습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과거를 탓하며, 염세적이며, 타인과 비교하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고, 수직적 관계에  익숙한 모습의 청년으로 말이다.  솔직히, 나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의 대부분도 '청년'과 동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의 '청년'은 마지막 밤에 '철학자'가 제시한 아들러의 '길잡이별'(나아갈 방향)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책 속에서 '철학자'가 계속하는 말,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는 건 말 스스로 해야 한다" 처럼,  책이 아들러 심리학을 통해 '네 삶을 변화시킬 용기'를 제시하고 있지만, 내가 계속 "용기만 갖고 행한다고, 그게 될까요?"라는 의심을 갖으며, 물 마시기를 거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기하 밴드의 노래 '그건 니생각이고'도 좀 생각났다. 그냥, 심리학이라는 학문 또는 단일 분석 구조에  70억 명의 개개인 인간의 심리를 맞출 수 있을까라는 회의주의가 일어났다. )

 

그래도, 책 속의 대화는 형이상학적인 철학, 심리학적인 전문용어나 어려운 인용 없이, 두 사람의 일상적이고 평이한 대화로 아들러 심리학을 쉽게 풀어나가고 있어서 읽기가 쉬었다.  '아, 이런 내용이네'라고 정보, 지식 차원에서 아들러 심리학을 이해하기는 편했다. 

 

책 속에서 발췌

적다 보니 내용이 길어져서 접은 글로 대체했다. 


더보기

첫 번째 밤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22/140) 과거의 원인에 주목해서 상황을 설명하려 든다면모든 이야기는 저절로 결정론에 도달하게 되네즉 우리의 현재그리고 미래는 전부 과거 사건에 의해 결정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지.

(23/140) 아들러 심리학은 트라우마를 명백히 부정하네이런 면이 굉장히 새롭고 획기적이지분명히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은 흥미진진한 데가 있어마음의 상처(트라우마)가 현재의 불행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인생을 거대한 이야기라고 봤을 때그 이해하기 쉬운 인과 법칙과 드라마틱한 전개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매력이 있어하지만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는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25/140) 간단해. 자네는 ‘화가 나서 큰소리를 낸 것’이 아닐세. 그저 ‘큰소리를 내기 위해 화를 낸 것’이지. 다시 말해 큰소리를 내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지어낸 걸세

(중략)

모르겠나? 요컨대 분노란 언제든 넣았다 빼서 쓸 수 있는 ‘도구’라네. 전화가 오면 순식간에 집어넣았다가 전화를 끊으면 다시 꺼낼 수 있는. 엄마는 화를 참지 못해서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야. 그저 큰소리로 딸을 위압하기 위해, 그렇게 해서 자기의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할 걸세.

→ (동의) 확실히 분노는 내 주장이나 의도를 강압적 또는 밀어 붙이기 위한 상황일 때 주로 이용되지... 


(28/140)자네는 지금 행복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네. 왜냐하면 자네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지. Y처럼 되고 싶어서 지금의 자신을 버리려고 하네. 아닌가?

(중략)

다시 아들러가 했던 말을 인용해보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자네가 Y나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만 주목하기 때문일세. 그러지 말고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주목하게나

→ (대체로 동의) 보통 워너비(wannbe)를 생각하며, 워너비의 조건을 부러워하고, 그렇지 못한 자신을 아쉬워하고 책망하지...


(33/140) 아니, 자네는 바꾸지 못하는 게 아니야. 인간은 언제든, 어떤 환경에 있든 변할 수 있어. 자네가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네

(중략)

조금 불편하고 부자유스럽긴 해도, 지금의 생활양식에 익숙해져서 이대로 변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니까. ‘이대로 나’로 살아간다면 눈앞에 닥친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경험을 통해 추측할 수 있어. 비유하자면 오래 탄 차를 운전하는 상태인 거네. 다소 덜거럭거려도 차의 상태를 고려해가며 몰면 되지. 하지만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면 새로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눈앞의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라.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서 불안한 삶을 살게 되지. 더 힘들고, 더 불행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즉 인간은 이런저런 불만이 있더라도 ‘이대로의 나’로 사는 편이 편하고, 안심되는 거지.

(중략)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분명 자네는 후자를 택할 테지.

→ (대체로 동의) 그래, 지금 내향인, 아싸의 삶의 형태를 버리고, 외향인, 인싸로 바꾸려고 불안, 불편, 예측 불가의 길로 가기보다는 지금 그래로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하지... (결국, 용기가 없어서 인가?)


(35/140) 아니,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닐세. 오히려 아들러의 목적론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라고 말해주는 거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자네라고 말일세.

→ (반산반의)  결국,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지금 여기부터 용기를 갖고 시작하면 바뀐다는 말은 경험적으로 반반인 것 같은데... 


두 번째 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39/140) 그렇지 않네. 단점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네가 ‘나 자신을 좋아하지 말자’라고 결심했기 때문이야. 자신을 좋아하지 않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장점을 보지 않고 단점에만 주목하는 걸세. 먼저 그 점을 이해해야 하네.


(41/140) 적면공포증에 걸린 여학생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차이는 것을 두려워하듯 자네는 남에게 부정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네.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을 무서워하지. 그런 상황에 휘말리느니 처음부터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걸세. 즉 자네의 ‘목적’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이라네.

(중략)

인정하는 것은 훌륭한 태도일세. 하지만 잊지 말게.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해.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자네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 아들러는 말했네.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지.

→ (반산반의)  모든 인간관계가 크고 작은 상처 투성이라...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너무 염세적인 거 같다....


(45/140) 아들러도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인정했네. 열등감 자체는 조금도 나쁜 게 아닐세.

(중략)

우선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네. 그리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보편적인 욕구를 갖고 있지. 아들러는 이를 ‘우월성 추구’라고 했네.

(중략)

여기서는 간단히 ‘향상되기를 바라는 것’,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예를 들어 아장아장 걷는 아기는 두 발로 서게 되고, 말을 배워서 주변 사람들과 자유로이 의사소통을 하게 되지. 우리는 모두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더 나아지길 바라는 보편적인 욕구를 갖고 있네. 인류사 전체를 보자면 과학의 진보도 ‘우월성 추구’라고 할 수 있고,

(중략)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열등감일세. 인간은 누구나 더 나아지길 바라며 우월성을 추구하지. 그래서 어떠한 이상과 목표를 내걸고 그것을 향해 전진한다네. 하지만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내가 뭔가 모자라다고 느끼게 돼.

(중략)

아들러는 “우월성 추구도 열등감도 병이 아니라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성장을 하기 위한 자극이다”라고 말했네. 열등감도 제대로만 발현하면 노력과 성장의 촉진제가 되는 거지.

→ (반산반의)  우월성 추구, 열등감은  건강하고, 성장을 위한 자극이다는 좋은 의미로 알겠는데,  열등감이 개인에게 미치는 폐해가 너무 큰데, 그걸 좋은 쪽으로 수용하기가 쉽지 않네요...


(48/140) 예를 들어 자신이 권력자-학급 반장에서부터 저명인사까지 광범위하지-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짐짓 어필하는 걸세. 그를 통해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지. 경력을 속이거나, 옷이나 장신구 등 브랜드 제품을 과시하는 것도 일종의 권위 부여이자 일부분 우월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지. 어떤 경우든 ‘나’라는 존재가 우월하다거나 특별해서 그런 것이 아닐세. ‘나’와 권위를 연결시킴으로써 마치 ‘나’라는 사람이 우월한 것처럼 꾸미는 거지. 즉 거짓 우월성일세.

(중략)

단 권위의 힘을 빌려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맞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되지.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라네.

(중략)

그렇지. 정말로 자신 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아. 열등감이 심하니까 자랑하는 걸세.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일부러 과시하려고 하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 누구 한 사람 ‘이런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봐 겁이 나거든. 이는 완벽한 우월 콤플렉스라네.

(중략)

그렇지. 불행을 무기로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얼마나 괴로운지 알림으로써 주변 사람들-이를테면 가족이나 친구-을 걱정시키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속박하고 지배하려 들지. 첫날 말했던, 집에 틀어박혀서 지내는 사람들은 곧잘 불행을 무기로 하는 우월감에 빠지네. 아들러가 “오늘날 연약함은 매우 강한 권력을 지닌다”라고 지적 했을 정도야.

→ (대체로 동의) 보통 가족, 친구 등 가까운 관계에서 맨날 '몸이 안 좋다'. '원래 성격이 그렇다' 이렇게 말하면,  안타깝고 맞춰주려고 노력하지만,  계속 반복되면 '이걸 무기로 써먹네'라는 생각이 든다. 


(51/140) 그렇지 않네. 앞서 걸으나 뒤에서 걸으나 관계없이, 쉽게 말해 우리는 세로축이 존재하지 않는 평평한 공간을 걷고 있네. 우리가 걷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

(중략)

경쟁과 연결된 얘기니까. 기억하게.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 가 없어.

(중략)

그것은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에 축복하지 못한 걸세. 하지만 일단 경쟁의 도식에서 해방되면 누군가에게 이길 필요가 없네. ‘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도 해방되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할 수 있게 되네. 그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언제든 도움의 손길을 내어줄, 믿을 수 있는 타인, 그것이 친구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 (대체로 부동의) 아직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경지에는 못 올라가서, 쉽게 타인에게  무조건적인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이 안됨


(57/140)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라는 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걸세.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노 이외의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걸세.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욱해서’라는 말이 나오는 거고, 분노를 매개로 커뮤니케이션이라면……

(중략)

나는 옳다, 즉 상대는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서 논쟁의 초점은 ‘주장의 타당성’에서 ‘인간관계의 문제’로 옮겨가네. 즉 ‘나는 옳다’는 확신이 ‘이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며 승패를 다투게 된다네. 이것은 완벽한 권력투쟁일세.

(중략)

지고 싶지 않다는 일념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되지.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야. 우월성 추구란 타인과 경쟁하는 것과는 상관없네.


(58/140)

행동의 목표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위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1.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2.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60/140) 물론이지. 자네가 변하면 주변도 달라지네.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아들러 심리학은 타인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일세. 타인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상황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닐세. 자네가 첫발을 내딛기를 기다리고 있지.

(중략)

함께 있으면 왠지 숨이 막히고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관계는, 연애는 가능해도 사랑이고 할 수는 없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고,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걸세. 반면에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내게 불신감을 품은 상대와 한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을 수 없겠지? 아들러는 말했네. “함께 사이좋게 살고 싶다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 (반신반의) 일단 나부터 바꿔라는 말을 따른다 해도, 상대가 같이 바뀌지 않는다면? '박수도 맞주쳐야 난다'라는 말도 있는데... 상대가 안 바뀌면 무슨 소용 있나라는 생각인 듦... (여기서 '니가 더 바뀌라. 더 노력해라'라는 말은 금지)


(62/140) 그건 그 사람이 어느 단계에서 ‘이 관계를 끝내고 싶다’고 결심하고, 관계를 끝내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세. 상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네. 자신의 ‘목적’이 변했을 뿐이지. 알겠나? 사람은 그럴 마음만 있으면 상대의 결점이나 단점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이기적인 생물이네. 상대가 성인군자와 같은 사람일지라도 싫어해야 할 이유 같은 건 간다히 찾아낼 수 있지. 그렇기에 세계는 언제든 위험한 곳이 될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적’으로 볼 수 있는 거라네.

(중략)

그렇다네. 아들러는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했어.

(중략)

자네의 생활양식, 인생을 사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 자신이라는 사실.


(63/140) 선생님의 말씀이 맞는지도 몰라도. 아니, 제게 부족한 것은 용기가 분명합니다. 인생의 거짓말에 대해서도 인정합니다. 저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워요. 인간관계로 상처 받고 싶지도 않거니와 인생의 과제도 뒤로 미룬 채 살고 싶어요. 그래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거고요. 네, 다 맞습니다. 하지만 결국 선생님의 말씀은 정신력으로 극복하라는 거잖아요! 너는 용기가 부족하니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불과해요. 그런 태도는 조언을 한답시고 “힘내라”하면서 어깨를 두드리는 어리석은 윗사람의 행동과 다를 바 없어요. 그렇잖아요? 이쪽은 힘이 나지 않아서 고민인데!


세 번째 밤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68/140) 알겠네. 지금 자네가 한 얘기를 아들러 심리학의 관점에서 설명해주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부정한다네.

(중략)

자네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네. 나도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중략)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할 때, 거의 모든 사람이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을 수단으로 삼네. 적절한 행동을 하면 칭찬받는다는 상벌교육의 흐름에 따라서 말이지. 하지만, 가령 업무에 목표 자체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되면 그 일을 하기가 과로울 걸세. 늘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른 사람의 펴가에 전전긍긍하느라 ‘나’라는 존재를 억누를 테니까.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상담을 받으러 오는 내담자 중에 성격이 제멋대로인 사람은 별로 없네. 오히려 타인의 기대, 부모와 선생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괴로워하지. 쉽게 말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걸세

→ (반신반의)  '니가 인정 받기 위해서 바뀌지 말고 그냥 스스로 바뀌는 걸로 만족해라'라고 말하면 좀 가혹한 것 같음... 


(73/140) 공부하는 것은 아이의 과제일세. 거기에 대고 부모가 “공부해”라고 명령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에, 비유하지면 흙투성이 발을 들이미는 행위일세. 그러면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지. 우리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중략)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만약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을 했을 때 그 결정이 가져올 결과-이를테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지망하는 학교에 불합격하는 등-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사람은 부모가 아니야. 아이란 말이지. 즉 공부는 아이의 과제일세

(중략)

세상 부모들은 흔히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지. 하지만 부모들은 명백히 자신의 목적-세상의 이목이나 체면일지도 모르고, 지배욕일지도 모르지-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네. 즉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렸기에 아이가 반발하는 걸세.

(중략)

여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네. 아들러 심리학은 방임주의를 권하는 게 아닐세. 방임이란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라네. 그게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 공부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하는 걸세. 단 아이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하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중략)

물론이지. 이를테면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상담 시에 내담자가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는 카운슬러의 과제가 아니라고 여기네.

(중략)

상담을 받은 결과, 내담자가 어떤 결심을 했는가, 생활양식을 바꿨는가, 바꾸지 않았는가, 이는 내담자 본인의 과제고 카운슬러는 거기에 개입할 수 없네.

(중략)

물론 곁에서 최선을 다해 돕기는 하지. 하지만 끝까지 개입하지는 않아. 어느 나라에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네. 아들러 심리학에서 하는 상담, 혹은 타인에 대한 지원 전반에 그런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게. 본인의 의향을 무시하고 ‘변하는 것’을 강요해봤자 나중에 반발심만 커질 뿐이지.

(중략)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네

→ (반신반의)  대부분의 성공학, 자기 계발서의 주장, '니가 바뀌면 성공 따라온다'라는 말 처럼 들림,   '내가 바뀌었는데, 크게 안 바뀌던데요?'라고 하면 '니가 덜 바뀌어서 그래'라는 답변 금지


(76/140) 만약 자네가 과제를 분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즉 상사가 아무리 부당하게 화를 내도 그것은 ‘나’의 과제가 아닐세. 상사가 해결해야 할 과제지자네가 먼저 다가갈 필요도 없고,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어. 자네가 할 일은, 내 인생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내 과제를 직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

(중략)

인간은 모두 인간관계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네. 이를테면 부모님과 형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직장동료와의 관계일 수도 있지. 그리고 지난번에 자네가 말했지? 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내 제안은 이렇네. 먼저 ‘이것이 누구의 과제인가’를 생각하게. 그리고 과제를 분리하게.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 걸세.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이고도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아들러 심리학만의 획기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지.

→ (대체로 동의) 그냥 마이웨이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제공한다고 생각이 들지만,  싫은 사람의 싫은 소리를 씹을 수 있는 마음 달램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에 듦


(80/140) 맞아. 자네 말대로 미움을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게나.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밖에 없네. 언제나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모든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만약 주변에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 명 전원에게 충성을 다하는 거지. 그러면 당장은 누구에게라도 미움받지는 않을 걸세. 그런데 여기에는 큰 모순이 기다리고 있어.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일념에서 열 명 전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마치 포퓰리즘(populism)에 빠진 정치가처럼 하지도 못할 일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거나, 책임지지 못할 일까지 떠맡게 될 소지가 있네. 물론 그 거짓말은 머지않아 발각될 테고, 그리고 신용도 잃고 인생은 더욱 고달파지겠지. 물론 계속된 거짓말로 인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도 상상을 초월하네. 자네는 이걸 이해해야 돼.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살면, 그리고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자신에게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걸.

→ (대체로 동의) 남에게 보이려고 삶을 살 필요는 없음. 그냥 인생은 혼자 가는 거니까라고 생각하면 편함


(82/140) 자네는 아마 ‘조직에서의 해방’을 자유라고 생각했겠지. 가정이나 학교, 회사 또는 국가에서 뛰쳐 나오는 것 말이야. 하지만 실제로 조직을 뛰쳐나와도 진정한 자유는 얻을 수 없네.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자유롭게 살 수 없지

 


네 번째 밤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98/140) 과제의 분리에 대해 설명할 때 ‘개입’이라는 말을 쓴다네. 타인의 과제에 불쑥 끼어드는 행위를 뜻하지. 그러면 왜 인간은 개입을 하는 걸까? 그 배경에는 사실상 수직관계가 있지.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보고 개입하네. 상대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끈다.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믿고 있지. 물론 여기서 개입은 조종이나 다름없네. 어린아이에게 “공부해”라고 명령하는 부모가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지. 본인은 선의로 그렇게 말했는지 몰라도, 결국은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남의 일에 불쑥 끼어들어서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조종하려고 하는 거지.


(100/140) 그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네. 평가란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말일세. 만약 수평관계를 맺고 있다면 감사나 존경, 기쁨의 인사 같은 더 순수한 말이 나오겠지.

(중략)

칭찬받는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는 걸세. 그리고 그 행위가 좋은지 나쁜지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의 기준이고. 칭찬받고 싶다면 타인의 기준에 맞춰 행동할 수밖에 없어. 자신의 자유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네. 반면 ‘고맙다’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보다 순수한 감사의 인사라네.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되지.

(중략)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네. 지금까지 논의했던 ‘공동체 감각’이나 ‘용기 부여’에 관한 말도 전부 이와 연결되네.

→ (대체로 동의) 남에게 보이려고 삶을 살 필요는 없음. 그냥 인생은 혼자 가는 거니까라고 생각하면 편함  


다섯 번째 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110/140) 과제를 분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

(중략)

음. 그러고 보니 전에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라는 작가가 이와 비슷한 말을 인용했더라고요. “신이여, 바라옵건데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라고요. 《제5도살장》(Slaughterhouse-five)라는 소설이었어요.

(중략)

그래, 우리는 능력이 부족하는 것이 아니라네. 그저 ‘용기’가 부족한 거지. 모든 것은 ‘용기’의 문제라네.

→ (대체로 동의) 바꿀 수 있는 바꾸는 용기와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에 대한 실행력은 어디서 오는지 묻고 싶음


(114/140) 다시 말해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질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고 말했었네. 기억이 나나? 즉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지.

(중략)

가장 알기 쉬운 타자공헌은 ‘일’이라네. 사회에 나가 일하는 것. 또는 집안일을 하는 것. 노동이란 돈 버는 수단이 아니야. 우리는 노동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고, 공동체에 헌신하며, ‘나는 누군가에게 두옴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지. 나아가서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받아들이게 되지.

(중략)

그럴 때 그릇을 치우면서 ‘나는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는 걸세. 설령 가족들로부터 ‘고맙다’라는 말을 듣지 못하더라도 말이야. 남이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해보라는 걸세.

(중략)

그러면 왜 그 순간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걸까? 가족을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그렇지 않으면 “왜 나만?”, “어째서 다들 돕지 않는 거야?”라는 억울함만 생기겠지. 다른 사람을 ‘적’으로 간주한 채로 하는 공헌은 어쩌면 위선일지 몰라. 그런데 다른 사람이 ‘친구’라면 어떠한 공헌도 위선이 아니라네.

→ (반신반의) 타인, 공동체에서 인정 받기 위해서 공헌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친구를 위해 조건 없는 공헌을 하라고 하면... 자원봉사가 아닌 이상(자원봉사라 해도) 쉽지 않음


(121/140) 자네는 중요한 문제를 잊고 있어. 공헌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라면 결국 남이 의도한 대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어. 인정욕구를 통해 얻은 공헌감에는 자유가 없지. 우리는 자유를 선택하면서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네.


(124/140) 이럴 때 아들러 심리학이 중요하게 내세우는 것이 ‘평범해질 용기’일세.

(중략)

왜 ‘특별’해지려고 하는 걸까? 그건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특별히 잘하는’ 상태가 실패로 돌아가면 극단적으로 ‘특별히 못되게 구는’ 상태로 빠르게 넘어가는 걸세. 그런데 보통인 것. 평범한 것은 정말로 좋지 않은 걸까? 어딘가 열등하다는 뜻인가? 실은 누구나 평범하지 않나? 그 점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네.

(중략)

그래. ‘지금’이라는 찰나의 연속이지.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밖에 없어. 우리의 삶이란 찰나 안에서만 존재한다네. 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선’의 인생을 강요하지. 좋은 대학, 대기업, 안정된 가정 등 이런 선로를 따라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면서. 그래도 인생은 선이 아니라네.

→ (반신반의)  평범함의 기준이 뭔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인데, 주인공보고 평범하게 살아라라고 하면 누가 그걸 따를지...  대체적으로 물론 자기 능력과의 타협으로 평범하게 살며, '지금, 여기' 순간에 충실하게 살지만 그래도 무욕심의 워딩이 별로...


(129/140) 먼 장래에 이룰 목표를 설정하고 지금은 그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걸 하고 싶은데 아직 때가 아니니 그때가 되면 하자’라고 생각한다. 이런 건 인생을 뒤로 마루는 삶의 방식이네. 인생을 뒤로 미루는 한 우리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단색으로 칠해진(monochrome) 따분한 나날만 보내게 될 걸세. ‘지금, 여기’는 준비 기간이고 참는 시기라고 여기고 있으니까. 그런데 먼 장래에 있을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는 ‘지금, 여기’도 이미 내 삶의 일부라네.

(중략)

목표 같은 건 없어도 괜찮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춤일세. 심각해질 필요 없어. 진지하게 사는 것과 심각한 것을 착각하지 말게.

(중략)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네.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고,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서 뭔가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거지. 자네는 지금까지 ‘지금, 여기’를 외면하고 있지도 않은 과거와 미래에만 빛을 비춰왔어. 자신의 인생에 더없이 소중한 찰나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던 거야.


 

(130/140) 인생이 찰나의 연속이라고 할 때, 인생이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고 할 때, 대체 인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중략)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답했네.

(중략)

그래서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답하고는, 이어서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네.

→ (반신반의) 빅터 플랭클의 ‘로고 테라피’에서는 인생의 의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2024.01.24 - [0500_독서]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제목:빅터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원제:Man’s search for meaning 저자:빅터 프랭클Viktor Emile Frankl 역자:이시형 출판사:청아출판사 독서일:2024.1.21.~2024.1.23. 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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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자네는 헤매고 있네. 왜 헤매는 것일까? 그건 자네가 ‘자유’를 택하고자 하기 때문일세. 즉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타인의 인생을 살지 않는, 자기만의 길을.

(중략)

자네가 어떠한 찰나를 보내더라도, 설령 자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고 뭘 해도 상관없어.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며 자유롭게 살면 되네.

(중략)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는 뜻이지. 아들러 심리학을 배우고 나면 내 눈에 보이는 세계는 이제 과거의 세계가 아니라네

(중략)

한 번 더 아들러가 했던 말을 들려주겠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적인지 아닌지 상관하자 말고.”

 

→ (반신반의) 결국, 암기식으로 아들러 심리학을 배우고 받아들여도, ' 나를 바꾸는 용기를 갖고, 나부터 시작해서  바꾸어 나간다고 할 때,  그게 행복으로 연결되나요?'  (자기수용, 자기추구, 타인공헌을 통해 (남이 나를 인정해 주는) 행복이란 관점을 바꿔라고 말하기 금지)


 

책 속에서 새로 알게 된 단어

  1. 타기唾棄: 업신여기거나 더럽게 생각하여 돌아보지 않고 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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